[일사일언] 석유 왕자는 물수박 책임져라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 왕자가 있다면, 오래전 한국엔 수박 공주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수박을 먹을 때면 나는 몇 입 먹고 버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아까운 줄 몰랐다. 우리 집엔 수박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귀농한 부모님은 다양한 밭농사를 시도했는데, 그중 수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수박을 팔고 나면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과실을 우리 세 자식들이 날랐다. 그야말로 잔나비의 노래 제목처럼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는 수박뿐인 시절을 보냈다. 주스나 화채 같은 것으로 만들어 먹어본들 수박은 수박이었다. 심지어 할머니는 그 껍데기로 김치를 만들기도 해서 수박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지나치게 풍요로운 수박의 시절이었다. 그러다, 요 몇 년 사이 나도 수박을 찾게 됐다. 뙤약볕과 땀과 무거움으로만 기억되던 수박은 알고 보니 장점밖에 없었다. 폭신폭신한 식감, 풍성한 수분 함량, 달콤한 맛, 식욕을 자극하는 색감. 이래서 다들 그렇게 카페에서 수박주스를 사 먹는 거구나.
애석하게도, 올해 수박 값은 놀라울 정도로 비싸다. 한 통에 수만 원 하는 수박을 보면서 그 옛날 내게 하대받던 녀석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그 비싼 수박 다수가 ‘물수박’이다. 올해 연이은 집중호우로 충남 지역에 몰려 있는 수박 산지 60%가 물에 잠겼다고 한다. 이쯤 되면, 석유 왕자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폭우가 잦아져 여름의 대표 과일 수박의 맛이 큰 타격을 입었고, 산유국은 온실가스의 주요 원인이 되는 화석연료 소비를 주도해 온 선진국과 함께 기후 위기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휘발유로 목욕하고도 남을 정도라는 석유 재벌들이 그간 축적한 부를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전환에 과감하게 투자하길 바란다. 또한 2023년, 기후변화 대응 순위가 64국 가운데 산유국 3곳을 제외하고 꼴찌라는 평가를 받는 한국은 지속 가능한 고당도 및 합리적 가격의 수박주스 수급을 위해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공격적인 기후변화 대응책을 내놓으면 좋겠다. 비싸고 맛없는 물수박이 많아지는 현상은 나와 같은 개인의 비애로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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