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위스키 풍미의 비밀… 미즈나라의 모든 것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김지호 기자 2024. 8.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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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데 구하기는 어렵고, 막상 다루려니 한없이 까탈스러운. 그런데도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소비자들은 즐겁지만 위스키 업자들에게는 하나부터 열까지 악몽 같은 ‘미즈나라’ 이야기입니다. 미즈나라는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의 활엽수림을 구성하는 수목입니다. ‘미즈’는 일본어로 물을, ‘나라’는 참나무를 의미합니다. 해석하자면 ‘물참나무’입니다.

예로부터 참나무는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다 타고 남은 숯까지 버릴 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나무의 단단하고 질긴 물성 덕분에 고대 무기부터 전함, 건축, 가구 등 안 쓰이는 곳이 없었습니다. 위스키업계에서도 참나무, 즉 오크는 떼려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일본 야마자키 증류소의 숙성고 모습. /Suntory Global Spirits

보통 위스키 맛의 8할은 오크통에서 나옵니다. 증류소에서 갓 뽑아낸 원액은 수년간 오크통에서 숙성돼 위스키로 완성되기 때문이죠. 스카치 업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나무 품종은 아메리칸 화이트 오크와 유러피언 오크입니다. 상대적으로 접근성도 좋고 목재 다루기가 쉬운 편입니다. 하지만 근래 가장 주목받고 있는 나무 품종을 꼽으라면 미즈나라일 것입니다. 위스키 라벨에 미즈나라의 ‘흔적’만 있어도 가격이 심상치 않음을 쉽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미즈나라의 특징

미즈나라는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의 활엽수림을 구성하는 수목입니다. ‘미즈’는 일본어로 물을, ‘나라’는 참나무를 의미합니다. /inaturalist

생산자 입장에서 미즈나라는 장점보다 단점이 많습니다. 일단 너무 희귀하고 값이 비쌉니다. 오크통 한 개에 가격은 6000달러 이상.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아메리칸 오크통의 10배가 넘는 가격입니다. 심지어 미즈나라는 일반 참나무처럼 곧게 자라지 못하고 생육이 굽이굽이 뒤틀려 있습니다. 오크통 제작에 쓰이는 길쭉하고 곧게 뻗은 스타브(Stave)로 가공하는 데까지 훨씬 많은 품이 들겠지요. 게다가 나무를 베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최소 200년. 아메리칸 화이트 오크는 약 70년, 유리피언 오크가 100년 정도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이 또한 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즈나라는 일반 참나무보다 내부에 구멍이 많아 오크통의 방수 효과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사진은 미즈나라 오크통에서 위스키 원액이 샜던 흔적이 있는 모습. /김지호 기자

미즈나라는 높은 다공성(多孔性)으로 인해 많은 수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반 참나무보다 내부에 구멍이 많아 오크통의 방수 효과가 떨어질 수 있겠지요. 위스키를 수년간 담아야 하는 오크통이 방수가 안 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유지보수 비용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위스키 누수를 제때 발견하지 못하면 치명적일 수 있겠죠. 이 과정에서 결국 ‘천사의 몫’으로 날아가는 증발량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스피릿에 미즈나라의 풍미가 비교적 빨리 스며든다는 점 정도. 이쯤 되면 대체 생산자들이 왜 미즈나라에 집착하는지 의문점이 생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게 미즈나라 오크통만의 독특한 풍미입니다.

보모어 증류소 숙성고. 미즈나라 오크통에서 숙성중인 위스키. /globetrekimages

미즈나라는 락톤과 바닐라 함량이 높고 참나무 중에서도 낮은 타닌 수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높은 락톤 수치는 위스키에 코코넛과 같은 풍미를 더 해주고 바닐라는 달콤함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킵니다. 낮은 타닌 수치는 장시간 숙성 시 자칫 떫어질 수 있는 위스키 맛을 부드럽게 유지합니다. 이에 더해 미즈나라만의 독특한 매콤함은 감초와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미즈나라에서 흔히 언급되는 풍미 중 하나가 백단향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여인들이 사용하던 천연 향수와 같은 느낌이죠. 서양에서 흔히 샌달우드로 불리는 백단향은 은은하면서 고혹적인 ‘동양의 달콤함’이 특징입니다. 수백 년 이어져 내려온 스카치의 역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풍미를 일본이 발견한 셈이죠. 물론 시대적 배경이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해주긴 했습니다.

◇미즈나라 오크통의 시작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위스키 산업에 위기를 맞았습니다.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오크통 수입에 차질이 생겼던 것이죠. 당시 자국 내에서 어떻게든 오크통을 수급해야 했던 야마자키 증류소가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선택한 게 미즈나라입니다. 당장 늘어나는 위스키 수요를 어떻게든 소화해야 했던 것이죠.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처럼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초창기만 해도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미즈나라 숙성에 대한 연구자료가 전혀 없었던 시절이죠. 미즈나라 오크통이 가진 수많은 단점은 결국 짧은 숙성연수로 이어졌고 술맛은 거칠고 풍미도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집요하게 이어진 여러 가지 실험과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이 오늘날 미즈나라의 명성을 완성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제품을 선택해야 할까?

시중에는 미즈나라 오크통에서 피니시만 한 제품들이 대부분입니다. 위스키의 숙성 마무리 단계에서 미즈나라 풍미만 입히는 작업이죠. 이러면 미즈나라의 캐릭터가 미세하게 살아있긴 하지만 오롯이 느끼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미즈나라 오크통에서만 숙성시킨 제품들은 대부분 너무 비싸거나 만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일본의 여러 크래프트 증류소에서도 미즈나라를 사용한 제품들을 출시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극소량입니다. 그나마 운이 좋다면 일본 몰트 바에 가야만 간혹 맛볼 수 있는 정도입니다.

(왼쪽에서 두번째)일본 시즈오카 증류소에서 출시한 미즈나라 5년 숙성. /김지호 기자

그중에서도 딱 하나만 고르자면 일본 시즈오카 증류소에서 출시한 미즈나라 5년 제품을 추천합니다. 이는 단순히 구색만 갖춘 게 아니라 한 미즈나라 오크통에서 만 5년을 숙성해 전 세계 163병만 출시된 제품입니다. 알코올 도수는 57.3도. 애당초 숙성 과정에서 증발량이 40%가 넘었던 상황이라, 어지간한 고숙성 스카치보다 수량이 적게 병입된 셈이죠. 인연이 된다면 꼭 잔술로라도 마셔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위스키를 한 모금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는 순간 “내가 미즈나라다”라는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니깐요.

이제는 일본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이 미즈나라 오크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트랜드가 돼가고 있는 셈이죠. 문제는 투명성입니다. 말 그대로 미즈나라에 살짝 담갔다가 빼기만 해도 미즈나라 피니시라는 표현을 쓸 수 있기 때문이죠. 고귀한 참나무의 삶이 위스키 업계 마케팅의 일부로 끝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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