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위험한 음모론 전성시대
“코로나19는 인종적으로 겨냥된 것이다. 코로나19에 백인과 흑인은 취약하고 유태인과 중국인들은 강하다.” ‘미국식 진보’를 상징하는 존 F 케네디의 조카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는 세계를 공포로 몰고 갔던 코로나19가 백인과 흑인을 공격하기 위해 유포된 것이라는 충격적 음모론을 주장한다.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9·11 테러가 미국 정부가 계획한 것’이라는 주장부터 드루킹 사건으로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진보정치의 아이콘 ‘노회찬 의원이 타살당한 것’이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온갖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음모론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건으로 득을 본 사람이 그 사건을 몰래 일으킨 것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총선에서 이승만은 참패해 정치생명이 끝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전쟁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이 같은 사실에 기초해 생겨난 것이 이승만이 정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북을 선제공격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북침설’ ‘남침 유도설’이다.
최근 우리가 음모론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 때문이다. 김 전 의장은 회고록에서 이태원 참사 두 달 뒤인 2022년 12월 국가조찬기도회를 계기로 윤석열 대통령과 독대했는데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가 “특정세력에 의해 유도되고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이 그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당시 원내대표였던 박홍근 의원이 김 전 국회의장이 윤 대통령 독대 후 자신에게 윤 대통령의 말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하도 충격적이라 메모 해뒀다고 폭로했다. 윤 대통령이 이태원 참사에 대해 “KBS, MBC, JTBC 등 좌파언론들이 사고 2~3일 전부터 사람들이 몰리도록 유도한 방송을 내보낸 이유도 의혹”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실 비판처럼, 김 전 의장이 윤 대통령과 독대를 요청해 나눈 이야기를 공개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민 일반의 눈높이가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극단적인 소수의견이 보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전하려는 취지였다”는 김 전 의장의 해명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또 국회의장까지 지낸 사람이 윤 대통령이 전혀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내 원내대표에게 이야기하고 회고록에 썼겠는가?
파장이 커지자, 김 전 의장은 회고록 2쇄본에서 윤 대통령이 그 같은 극단적 주장까지 있다고 전해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수정했다. 대통령 자신이 음모론에 경도된 것 같은 뉘앙스에서 한발 후퇴한 것이다. 설사 수정된 내용처럼 윤 대통령 자신이 음모론에 경도된 것이 아니라 그 같은 극단적 견해까지 있다고 보고를 받은 것에 불과하더라도, 대통령 주변에 이 같은 황당한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심각한 문제다.
음모론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요즘처럼 음모론이 기승을 부린 적은 없다. 예를 들어, 미국 유권자 3명 중 한 명이 부정투표 덕으로 바이든 대통령이 트럼프를 이겼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왜 최근 들어 음모론이 이처럼 기승을 부리느냐는 것이다. 음모론 전문가들은 현대사회의 두 가지 특징에 주목한다. 첫째, 정치적 양극화다. 정치적으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상대방에 대한 공격은 그것이 아무리 황당한 음모론이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추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화당 지지자일수록 2020년 대선에서 부정선거로 바이든이 이겼다는 음모론을 믿는다. 또 다른 특징은 인터넷,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발달이다. 전통적인 매체에서는 당연히 걸러질 황당한 주장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는 별 제재 없이 제멋대로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선정적일수록 구독자들이 늘어나는 유튜브의 상업성도 음모론이 기승을 부리는 원인이다.
무서운 것은 이 같은 음모론이 지지자들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데 중요한 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잘 보여주듯이, 많은 정치인들이나 정치세력들이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지지자 동원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음모론 전문가인 캐서린 옴스테드의 책 제목처럼, ‘현대 민주주의의 진짜 적은 음모론과 가짜뉴스’다.
음모론을 규제한다고 그 주요 통로인 인터넷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정치권이 음모론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통합의 정치를 통해 정치적 양극화를 줄이는 것이 음모론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을 막는 길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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