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돌아보기]상상과 질문
최근 교육계에 주요 문제에 대해 해결 방안을 발표할 기회가 있으면 녹서(Green paper)를 만들자는 주장을 많이 한다. 녹서 도입을 처음 주장한 박태웅에 의하면 녹서는 유럽에 있는 제도이다. 미래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주로 백서(White paper)를 만든다. 유럽에서는 백서를 만들기 전에 다가올 사회문제에 대한 질문을 만드는 과정을 먼저 가진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이해단체 모두가 질문을 제공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질문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주체들이 토론과 참여를 경험한다. 독일 정부는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동 4.0’이라는 백서를 내놓기 2년 전에 ‘노동 4.0’이라는 녹서를 만든 사례가 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사회문제가 발생하면 선진국의 사례를 살피고 선진국이 만든 백서를 참고해서 우리 사회에 맞게 적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 산업화의 후발주자가 가지는 장점이었다. 최근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면서 다른 나라가 겪지 못한 사회문제를 가장 먼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있다. 교육계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학생 수 감소와 AI 디지털교과서 도입 문제이다.
학생 수 감소의 문제는 일본이 이미 겪었지만 속도의 면에서 우리가 세계 최초이다. 전 세계 어디를 살펴보아도 10년 이내에 초등학생 수가 절반이나 주는 사례를 찾을 수는 없다. 국가 차원에서 AI 디지털교과서를 모든 학생에게 도입하여 사용하고 학습데이터를 모았던 나라도 없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우리가 처음으로 접하는 문제이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할 일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질문을 던지는 사회적 노하우가 부족하다.
질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질문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까? 대중들은 언제 질문이 생길까?
호기심이 생겨야 질문이 생긴다. 학생 수가 감소된 세상이 공포와 두려움만 가득하다면 질문은 생기지 않는다. AI 디지털교과서가 학생과 교사의 학업과 수업을 감시하는 디스토피아를 여는 열쇠라고 생각하면 질문은 생기지 않는다. 두려움과 불안은 시야를 좁히고 움츠려 들게 한다. 가고 싶은 세상이 되어야 호기심이 생기고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질문이 생긴다.
빈민들에게 소액 무담보 대출을 해주는 그라민은행을 만들었던 무하마드 유누스는 상상을 해야 세상이 바뀐다고 주장하며 ‘소셜픽션’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이언스픽션이 아이들의 상상을 자극하여 현실이 된 것처럼 사회의 변화를 위해선 소셜픽션을 먼저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다.
지금 교육계는 에듀픽션이 필요하다. 학생 수 감소와 AI를 교육에 도입하는 일에도 새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학생 수 감소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부분만 있지 않다. 학급당 학생 수가 줄고 다양한 전문 교사를 배치하여 학교의 교육력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애리조나주 한 초등학교의 경우 유치원 한 학년 4개 반과 초등학교 18개 반 총 22개반이 운영되는 학교의 경우 특수교사 7명을 포함한 교사 29명과 관리자 3명 외에도 언어치료사 4명, 작업·물리 치료사 4명, 사회복지사 3명 등 영양사와 조리사 환경미화원을 제외하고도 42명의 지원인력이 있다. 학생 수 감소가 학교의 모든 아이들에게 질 높은 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AI 디지털교과서도 학습에 대해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학습장애나 경계선 지능을 가진 아이들을 조기에 발견하고 개별화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이 가능한 세상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질문하고 준비해야 할지 마음껏 이야기하는 장이 필요하다. 학생 수 감소와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에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소통의 장을 통해 불안은 사라지며 오히려 참여의 역동성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교육부는 AI 디지털교과서에 쏟아붓는 예산 중 일부라도 녹서를 만드는 일에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홍인기 교육정책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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