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뒷것 김민기

기자 2024. 8. 7. 20:4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4년 7월21일 김민기가 사망했다. 향년 73세다. 네이버 인물 소개에 따르면 1951년 3월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고, 공연연출가이자 전 가수이다. 조선시대식이라면 ‘뒷것’은 호처럼 들리지만, 그렇진 않다. 하지만 오늘날 감각이라면 스스로 붙인 ‘자호(自號)’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는 무대에서 관객의 주목을 받으며 연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을 ‘앞것’, 그들을 키우고 무대 뒤에서 보조하는 사람을 ‘뒷것’이라 했다. 그는 뒷것들의 두목을 자임했다.

김민기가 위중하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23년 말부터였다. 그가 과거 드물게 했던 인터뷰가 조금씩 들려왔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드러내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사망 이후 유튜브에 그의 과거 인터뷰, 지인들의 회고를 담은 클립이 많이 올라온다. 인쇄매체보다 영상매체가 사람들과 더 많은 접점을 지니고 또, 신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활자와 책으로 그가 평가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김민기를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위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91년 대학로에 소극장 학전(學田)을 세우고, 1994년 초연한 <지하철 1호선>의 오랜 연출가다. 여러 공연을 통해서 수백 명 연기자를 키워냈다. ‘學田’은 말 그대로 연기자를 키워내는 못자리 역할을 넘치게 해냈다.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하다. 또 그는 1970~1980년대 ‘저항가요’ ‘민중가요’의 두목에 해당한다. 그 저항과 민중의 노래는 음울하고 곱고 애잔하다. 노랫말은 한결같이 주장하기보다 읊조린다. 많은 사람이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좋아하는 이유일 것이다.

김민기를 1970~1980년대 포크계의 대부, 혹은 공연연출가라 말하는 것이 틀리지 않지만, 그의 생애를 온전히 담지는 못한다. 세상에 이미 알려진 것만으로도 다음 3가지 평가가 과하지 않다. 청년 시절 그는 천재성에 기반한 저항의 시인이었다. 일부러 저항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을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 말했지만, 여가로 만들어 부른 노래가 사람들 마음을 위로했다. 그는 자기 생애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고 불렀다. 대학에 입학해서 느낀 시대의 분위기를 담아 ‘아침이슬’을 만들었다. 군대 시절 30년을 복무하고 전역을 앞둔 부대 선임하사가 자기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막걸리 2말을 받고 ‘늙은 군인의 노래’를 만들었다. 대학 졸업 후 염색공장에서 일하며 동료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만들었고, ‘동일방직사건’을 노래굿 ‘공장의 불빛’으로 담아냈다. 살벌했던 1970년대 말의 일이다.

1991년에 그는 학전을 세우고 33년을 운영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형식의 소극장 공연을 만들었다. 놀라운 성공을 거둔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오래 공연했고, 사람들이 지금도 흥얼거리는 노래들을 부른 김광석을 배출했다. 김민기의 회고에 따르면 <지하철 1호선>을 처음 내놨을 때 기존 연극계와 뮤지컬 관계자들이 그것을 연극으로도 뮤지컬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다. 40대 이후 다양한 문화 장르 자체를 창작하며 한국 문화의 생장점이 되었다. 이전 시기 그의 천재성은 서정적 저항의 모습으로, 이 시기에는 탁월한 문화적 창조의 형태로 분출했다.

김민기는 민주적으로 학전을 운영했다. 학전은 배우·스태프들과 공연 계약을 했고 공연 수익을 전부 공개했다. 최저금액을 보장하면서 기여도에 따라 수입을 나눴다. 20대 배우·스태프들이 40대 중반의 김민기보다 월급을 많이 받았다. 투명한 행정이었고 민주적인 극단 운영이었다. 그는 자기 노래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다. 많은 사람에게, 오랜만에 사람에 대한 신뢰를 다시 느끼게 해준 사람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사람 위패를 서원에 두고, 본받고 기렸다. 그 소출을 서원 경비에 쓰는 땅도 학전이라 불렀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