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北 지령 따라 문건 보고해도 간첩죄 적용 못해… 간첩죄 개정 필요”

고도예 기자 2024. 8. 7.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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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2000년 청주로 내려와 택시 기사로 일하며 노동조합, 진보정당 활동을 해왔음. 최근 괴산군 환경수도사업소 입찰 건 관련 뇌물공여 사건과 연루돼 자유롭지 못하다…”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국내에서 활동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의 구성원 윤모 씨는 2019년 7월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에게 이런 문건을 보낸 혐의를 받고 있다. A4용지 3장 분량의 문건에는 북한이 포섭 대상으로 정한 지역 정치권 인사 A 씨의 이름과 전화번호, 사상 동향, 이력 등을 포함한 개인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은 윤 씨가 가지고 있던 이동식저장장치(USB)에서 암호화된 이 문건을 찾아냈고, 검찰은 윤 씨를 간첩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윤 씨의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가 북한 공작원에게 보고한 이 인물 정보 자료를 ‘국가 기밀’이라던가 ‘군사 기밀’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현행법상 간첩죄는 적국을 위해 국가 기밀, 군사 기밀을 누설한 사람을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도 1심은 “윤 씨를 비롯한 피고인들이 비록 국가보안법상 목적수행죄나 간첩죄로 처벌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북한의 지령에 따라 행동하고 정보를 제공했다”고 판단했다.

● “北 지령 받아 정보 넘겼는데도 ‘간첩죄’ 적용 못해”

이렇게 ‘적국’을 위해 국가, 군사 기밀을 누설한 사람을 처벌하도록 한 현행 형법, 군형법상 간첩죄를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동아일보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실이 주최하고 자유민주연구원(원장 유동열)과 한반도인권과 평화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주관하는 ‘현행 간첩법제 문제점과 혁신방안’에 대한 세미나 자료집을 입수했다. 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리는 이 세미나에 참석하는 대공수사에 종사해온 전직 경찰, 국가정보원 관계자들과 법학 교수들은 “1950년대 만들어진 낡은 형법, 군형법의 간첩 혐의를 손질해야 한다”는 공통된 의견을 제시했다.

현행법에 따라 ‘간첩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려면 ‘적국’을 위해 국가 기밀이나 군사 기밀을 넘겨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형법(98조)은 적국을 위해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사람, 군사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사람에 대해 사형, 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정하고 있다. 군형법(13조)도 적을 위해 간첩 행위를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간첩을 방조한 사람을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간첩단에 주로 적용되는 국가보안법위반 4조(목적수행)는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거나 지령을 받은 사람이 군사 기밀 또는 국가 기밀을 탐지, 수집하거나 누설한 경우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7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간첩 혐의자가 북한이 필요로 하는 각종 개인 정보를 넘기더라도 국가 기밀이나 군사기밀로 인정되는 정보가 아니라면 법원에서 간첩 혐의를 유죄로 인정받기 어렵다. 2007년 북한의 지령에 따라 군사 기지를 촬영한 뒤 사진을 공개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은 간첩 혐의로 기소됐던 사진작가 이모 씨에 대해 법원이 “공개된 자료”라며 무죄를 선고한 전례도 있다.

간첩 혐의를 인정받는 것이 어렵다보니 수사기관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정보를 넘긴 피의자에 대해 간첩 혐의를 적용하지 않는 사례들도 목격되고 있다. 북한 문화교류국 소속 공작원 전지선과 접선하며 ‘암호 문건’ 등을 통해 교신한 혐의를 받는 하모 씨에 대해 수사기관은 국가보안법위반 회합통신 및 편의제공 혐의를 적용했고, 간첩 혐의를 적용하지는 않았다.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 지령에 따라 국내 지역 정당 관련 정보를 수집해 전달한 ‘창원 자주통일 민중전위’에 대해서도 수사기관은 범죄단체활동 혐의 등을 적용했을 뿐 간첩 혐의를 적용하지는 않았다.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은 “현행법 체계는 안보 위해 세력을 제어하는 법제가 아니라 오히려 보호하는 법제로 전락하고 있다”며 “현행 간첩죄 관련 조항은 최소 32년, 최대 70년이 경과한 조항들인 만큼 안보 위해행위를 차단하는 법 개정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적국 아닌 우방국에 정보 넘긴 ‘스파이’에는 ‘간첩죄’ 적용 못해”

‘적국’이 아닌 우방국에 정보를 넘기는 ‘스파이 행위’를 간첩 혐의로 처벌할 수 없다는 점도 현행법에 규정된 간첩죄의 한계로 지적된다. 미국, 독일, 중국 등 주요국들이 ‘외국 정부’ 등에 기밀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을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때문에 우리 사정 당국은 북한이 아닌 다른 우방국 정부 또는 기업 관계자에게 군사 기밀 등을 누설한 피의자에 대해 간첩 혐의가 아닌 군사기밀보호법 혐의 등을 적용해 처벌해왔다. 유출한 정보가 군사기밀에 해당하면 군사기밀보호법을, 군사기밀이 아닐 경우엔 출입국관리법, 산업기술보호법 등을 적용해 처벌해왔던 것이다.

일례로 예비역 공군 장교 A 씨는 2006~2007년 미 군수업체 관계자에게 군사기밀인 합동원거리공격탄 도입 관련 정보를 넘긴 군사기밀 보호법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2008년부터 2014년까지 군사기밀 31건을 국내외로 유출한 해군 장교 B 씨도 간첩죄가 아닌 군사기밀보호법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장석광 국가안보통일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처벌 규정이 약한 국가에서 외국 정보기관은 자신의 간첩 행위에 대한 처벌이 미미하다는 것을 알고 보다 적극적인 간첩 활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국현 전 국정원 방첩국장은 “ 미‧일‧중‧러 및 유럽 각국의 정보요원이 나 특파원‧상사원‧유학생‧연구원의 스파이행위가 적발되어도 간첩죄로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이들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 스파이행위를 사실상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며 “스파이활동의 수단과 방법들이 지능화‧첨단화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간첩법제’는 냉전시대의 굴레를 못벗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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