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스포츠와 가짜 뉴스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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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육상연맹 홈페이지 내 '육상인 상식' 코너엔 '여성과 육상'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1896년에 시작한 근대 올림픽이 여성에게 좀처럼 육상 종목을 개방하지 않다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야 처음 허용한 역사를 소개하며 "800미터 결승에서 9명의 여자선수가 경기 중에 쓰러지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여자의 달리기 종목은 200미터까지로 제한됐다"라고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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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채윤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대한육상연맹 홈페이지 내 ‘육상인 상식’ 코너엔 ‘여성과 육상’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1896년에 시작한 근대 올림픽이 여성에게 좀처럼 육상 종목을 개방하지 않다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야 처음 허용한 역사를 소개하며 “800미터 결승에서 9명의 여자선수가 경기 중에 쓰러지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여자의 달리기 종목은 200미터까지로 제한됐다”라고 써놓았다. 사실일까. 당시 경기 영상을 보면 선두를 달리던 선수는 뒤를 돌아볼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결승점을 통과하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선수가 한 명 있긴 했지만 이내 일어섰다. 다른 선수들도 그저 거친 숨을 몰아쉴 뿐이다. 이 장면이 어찌 ‘사고’로 기록된 것일까.
최근 파리 사클레 대학에서 나온 연구보고서에 답이 있다. 세계신기록을 경신한 우승자의 성과 대신, 전세계 신문엔 여자 선수들이 모두 ‘반쯤 죽은’ 상태로 ‘구토’를 하고 ‘신경쇠약’에 빠졌다는 기사가 실린다. 과장된 뉴스는 역시 여성에게 장거리 달리기는 위험하다, 생식기에 무리가 간다 등의 걱정으로 바뀌었고, 이를 근거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국제육상연맹은 200미터 이상 달리기에 여성 출전 금지 결정을 내린다. 여자 800미터가 다시 올림픽 종목이 된 건 무려 32년 후인 1960년 로마 올림픽이다.
여자는 연약하고 남자만큼 스포츠를 할 수 없다는 편견과 싸운 역사가 곧 올림픽의 역사다.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훈련하고 도전하지만 세상은 ‘여자란 어떠해야 한다’는 한계 안에 가두려 한다. 여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은 여성도 자신의 국가를 대표하는 영광을 누릴 기회를 박탈할 뿐이다. 우리 사회에 ‘힘 센 여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생긴 건 역도 영웅, 장미란 선수 덕이다. 그리고 장미란 선수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건 그 직전인 2000년도에 여자 역도가 올림픽 종목이 된 덕이다. 이런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언론은 좀 더 신중하게 여자 스포츠를 다룰 의무가 있다.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권투 선수를 두고 며칠간 엄청난 기사가 쏟아졌다. 알제리의 이만 칼리프 선수를 신뢰할만한 근거도 없이 ‘XY염색체’를 가진 남자 혹은 트랜스젠더라고 했다. 마치 대단히 불공정한 경기가 벌어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기자들이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칼리프 선수가 (인터섹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 여성이란 걸 부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오시가 “성 정체성, 표현 및/또는 성적 변화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편견 없이 안전하게 스포츠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원칙을 정한 것에 주목하는 대신, 뜬금없이 출전 찬반 논쟁을 붙였다. 칼리프 선수가 어린 시절, 여자답지 못하다고 괴롭히는 남자 아이들의 주먹을 피하면서 권투 선수로서의 재능을 발견했고, 여자가 운동하는 걸 싫어하는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낸 사연에 관심을 가졌다면 그리 쉽게 남자같다고 모욕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올해 1월에 알제리의 소녀와 아동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롤모델로서 유니세프 대사로 임명된 사실, 때마침 지난 4월 유엔인권이사회가 인터섹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결의안을 첫 채택하는 역사적 성과는 외면했다. 무엇이 상식이 될 것인가. 언론의 책임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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