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정치에 소환된 ‘빈자의 은행장’
시시각각 밀려오는 성난 시민의 파도에 지난 5일 나라를 버리고 도주한 셰이크 하시나 방글라데시 총리(75)가 처음부터 독재자는 아니었다. 그는 부모가 군부에 암살당한 비운의 가족사를 딛고 일어선, 온화한 리더십의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그가 2010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장충체육관에서 가진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들과의 눈물어린 상봉은 한국 중장년 세대에겐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 파송 광부·간호사들을 ‘가난한 조국을 위한 애국자’라고 껴안으며 눈물바다가 된 46년 전 장면과 겹쳤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진 정치 지도자라도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고 장기 집권하게 되면 독재로 가지 않기가 어려운 것 같다. 하시나는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공공부문 일자리를 할당토록 한 제도에 항의하는 대학생 시위를 계기로 도합 20년 집권을 마감했다. 그의 재임 시절 산업화와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불평등 증대와 부정부패 만연 등의 불만이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민 전반에 확산돼 있었다. 그는 시민 자유를 통제하고 평화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최근 며칠 새 약 300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44년 전 5월 광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하시나 망명 후 시위 지도부는 과도정부 수장으로 무함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설립자(84)를 추대했다. 파리 올림픽 참석차 프랑스에 머물던 유누스는 제안을 수락했다. 유누스는 1983년 그라민은행을 설립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 대출과 경제적 자립 기회를 주는 운동을 편 경제학자이다. 이 운동이 방글라데시뿐만 아니라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영감을 준 공로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때 정치를 하려 했지만 하시나 정권하에서 계속된 표적 수사로 탄압을 받았다. 이번 시위 주도자들이 범야권 명망가이자 서민금융 기틀을 닦은 유누스에게 눈길을 돌린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1971년 독립 후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1억7000만 인구 대국의 혼란한 정국을 고령의 시민운동가가 잘 이끌지는 미지수다. 많은 시민의 희생 위에 어렵게 맞이한 ‘다카의 봄’이 또 다른 군부 쿠데타로 퇴행하지 않고, 약자의 연대에 기반한 새 국가를 만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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