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원, 버림받은 삶들을 언어로 수 놓은 자유인·해방자

한겨레 2024. 8. 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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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한 치도 시장화되지 않은 마지막 인간, 송기원을 기리며
히말라야의 설산을 등지고 앉아 명상에 든 고인. 출판사 문이당 제공

마지막 인간이 죽었다. 그 홀로 어제가 되었고 나머지들은 살진 오늘에 남게 되었다. 송기원이 죽었다. 그의 죽음에 서거, 별세 따위 권력과 허세의 때가 묻은 말은 어울리지 못한다. 그는 한 인간이 아니라 마지막 인간으로 죽었다. 그리하여 송기원이 죽었다. 또 읊조려보건만 그를 보내는 서러움, 아쉬움을 다 달랠 길 없다.

항간을 떠도는 조사에서 어떤 이는 전인미답의 파천황을 뇌까리고, 권력과 싸움을 하거나 거든 이들은 실천을 말하고, 여러 후배들은 빼어난 문장을 다시 보았다. 대개 재주 있는 사람은 사람됨이 메말라 인색하기 쉽고 인간미가 넘치면 재주를 발휘하는 데 공을 들일 겨를이 부족하다. 송기원은 이를 아울러 한생 펼쳐낸 사람이다.

송기원이 뜨겁게 살아온 시절은 흔히 말하는 7·8·90년대다. 이 시대는 붙여 읽어 마땅하다. 세 십년 동안 그는 네 번 구메밥을 먹었다. 인혁당 사건이 나기 전 먼저 문인간첩단 조작사건이 있었다. 유신 권력은 인간사회 문풍지인 문학인의 붓부터 꺾고자 했다. 그해는 1974년이었다. 유신헌법 개헌을 요구하는 문학인들을 연행한 보안사는 이 중 다섯 명을 구속하였다. 이에 문인들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처음 옥에 갇힌 그는 이를 기꺼워했다. 민주투사가 되어서가 아니라 선배 문인들만 어떻게 옥에 들여보내느냐는 거였다. 청년 송기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1974년 11월18일 서울 광화문 문인협회 사무실이 있던 의사회관(지금의 교보빌딩) 현관 앞에서 문인 대표들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식을 한 뒤 ‘자유실천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와 ‘자유언론 실천 선언’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를 비판한 이 선언 직후 대부분은 경찰의 닭장차에 실려 끌려갔다. 왼쪽부터 고인·고은·조해일·황석영·임정남·염무웅·박태순·윤흥길 등이다. 작가회의 제공

저 1980년 또한 송기원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는 김대중내란음모 조작사건으로 다시 끌려 들어갔다. 그가 옥에 있는 동안 경기도 화성 월문리에 살고 있던 어머니가 아들이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견디다 못해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는 6·25 무렵 총에 맞아 반신불수에 가까운 몸이었다. 소설 ‘월문리’ 연작에 이 대목이 묘사되어 있다. 옥에서 나온 그는 누구를 탓하기는커녕 ‘기쁨도 슬픔도 아닌 망망한 그리움’이라고 이를 기록하고 있다. 인간 송기원은 증오 같은 걸 애초에 품을 수 없는 천치였다.

송기원은 책임을 맡고 있던 실천문학사에서 찍어낸 부정기교육잡지 ‘민중교육’ 사건에 이어 1990년에는 오봉옥 시집 필화사건으로 한 번 더 옥방 신세를 져야 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송기원은 나는 옥을 이웃집처럼 들락거리는 누범에 잡범이니 선량한 시인은 풀어주고 나를 가둬달라 간청한다고 말했다. 방청을 간 동료 문학인들은 웃지 않을 수 없었고 판사마저 얼굴에 엷은 웃음을 띠었다. 어떤 법학도 인간학보다 앞설 수는 없다.

문인간첩단 등 옥살이 네번 했어도
단 한번도 민주화운동 뻐기지 않아
필화사건 땐 “선량한 시인 풀어주고
누범에 잡범인 나를 가둬달라” 간청

네 번 옥살이를 했음에도 송기원은 단 한 번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잠꼬대로도 뻐기지 않았다. 송기원은 그저 사상범 나부랭이나 어떤 주의에 속박되기에는 스스로가 너무 자유로웠다. 송기원은 자유인이었다. 그가 곧 자유였다. 그는 언제든 어떤 형태의 억압이나 폭력과도 싸울 채비가 되어 있었다. 타고난 전사라는 게 아니라 그의 천성이 권위와 압제를 못 견뎌 했다.

1977년 6월 유신체제를 비판한 장시 ‘노예수첩’이 일본 잡지에 실린 뒤 ‘국가모독죄’란 혐의로 구속된 양성우 시인은 79년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다. 그 길로 고은 시인의 서울 화곡동 자택에서 고인 등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들, 친구 등과 만나 밤새 석방 환영의 회포를 나눈 뒤 이튿날 아침 기념사진을 찍었다. 신문지를 붙여 ‘민족시인! 양성우 해방 만세!’라고 내건 펼침막은 고은 시인의 솜씨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장만철(장선우 감독), 성종대, 양관수, 이명준, 이시영, 고은, 박태순, 백낙청, 양성우, 염무웅, 임채정, 고인, 이진행. 한겨레 자료사진

송기원의 언행에는 굳은 이념 따위가 아니라 늘 사람이 있었다. 90년대 중반 언젠가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이 만난 적 없는 이복누이 흔적을 수소문하기 위해 떠나는 걸 환송하는 이별주를 다 마시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예약한 비행기가 하루 전에 날아간 뒤였다. 먼 길을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이 송기원에게는 천근보다 무거웠다. 어찌 그 술이 빨리 깰 수가 있겠는가. 그는 천하의 술꾼이었지만 그 술은 버림받은 존재들과 허물없는 만남을 점지하는 영검한 매개체였을 따름이다.

이념형 인간은 책과 조직을 통해 단련되고 실용형 인간은 생활과 돈에서 형성되지만 자유로운 영혼은 다분히 원초성을 띠는 존재다. 그건 바람의 거처가 달리 없는 것과 같다. 송기원이 대학을 들어갈 때 일이다. 이름난 백일장을 휩쓸어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는 합격 예정자였음에도 그는 굳이 공평하게 시험을 봐서 떨어진 소년 문학 천재였다. 운명은 거기 벌써 예정되어 있었다. 문학과 공평, 서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길항이 그에게는 순행이었다.

시를 소설보다 구구하게 쓰고
소설을 시보다 섬세하게 쓴
막힘 없는 언어의 주술사

송기원은 넝마주이 생활을 배울 적에 사나흘 뒤에 곧 능숙한 넝마주이가 되었고, 절에 들면 여느 스님보다 묵은 올깎이였고, 대폿집에서는 고향 없는 이들에게 다감한 오라버니가 되었다. 어딜 가도 막힘이 없었고 하찮은 누구와도 살붙이 벗이 되었다. 이 삶들은 녹아 송기원의 손을 거쳐 수를 놓은 듯한 언어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시를 소설보다 구구하게 쓰고 소설을 시보다 베를 짜듯 섬세하게 쓴 막힘 없는 주술사였다. 그가 탯줄을 묻은 곳은 남녘 갯가였어도 넋 깊은 곳 한 뼘쯤은 가보지 않은 땅 어디가 고향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인도란 지리로서 인도 따위가 아니라 영혼의 대지로서 인도였다. 그 인도는 절이고 교회이고 사랑방이고 변소이고 술집이었다. 문학과 삶에서 송기원은 혁명가나 구도자라기보다는 두루 자유인, 해방자였다.

1970년대 후반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하던 무렵, 고인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맨 왼쪽 이호철, 셋째 염무웅과 민영, 둘째 줄 왼쪽 셋째 고은, 신경림, (한 사람 건너) 고인·이시영, 셋째 줄 왼쪽부터 박태순·조태일, 오른쪽 둘째 백낙청씨 등이다. 투옥 중이던 양성우 시인의 부인 정정순(앞줄 오른쪽 둘째)씨도 함께했다. 작가회의 제공

송기원은 사람 중의 사람이었다. 그를 떠나보내면서 정녕 두려운 건 어쩌면 앞으로 더는 인간의 죽음과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다. 적어도 송기원은 한 치도 시장화되지 않은 마지막 영혼이었다. ‘실천문학’에 처음 소설을 발표하던 1989년 겨울 서울 종로구 적선동 밥집을 나오면서 송기원은 후배 어깨너머로 말했다. 실천문학사가 중구 필동에서 막 적선동으로 옮겼을 때였다. 배고플 때 술 생각날 때 연락해라. 그 자리가 곧 삶과 문학을 공부하는 학교였다. 이제 누가 뜻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술을 살 것인가. 지상에 마지막 인간아, 술빚 밥빚 글빚 삶을 빚진 후배가 붓을 구부려 올리는 이 술 한잔 받으시라. 상향.

서해성/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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