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함이라는 기쁨[유희경의 시:선(詩: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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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손이 비는 날이 있다.
시인 H 선배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예전 사람들에 비해 세 배쯤 더 많이 붙어 살고 있다.
창밖을 내다보는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은 없는지 불안해하는 내가 참 가엾다.
심심함으로 가득하던, 그리하여 눈에 닿는 것, 손에 집히는 것마다 발견이고 즐거움이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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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들을 꺼내놓고 자판을 두드려댄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다가/ 가방에 넣어 온 샌드위치나 우걱거리는 주말 오후,/ 내 삶도 이렇듯 지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한 게 대체 뭐지? 그새 날은 저물어오고/ 내가 한 일이라고는 샌드위치를 먹은 게 전부 같다’
- 박성우 ‘주말’(시집 ‘남겨두고 싶은 순간들’)
돌연 손이 비는 날이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획서에 원고 마감에 끼니도 잊고 일하다가, 할 일이 텅 비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이럴 때 책을 펴들면 좋으련만 맥을 놓고 창밖만 구경하고 있다.
모든 게 너무 가깝다. 우리는 너무 붙어 살고 있다. 시인 H 선배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예전 사람들에 비해 세 배쯤 더 많이 붙어 살고 있다. 예전이라면 언제를 가리키는 거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인터넷 전후지 뭐겠어.” 과연 촘촘한 네트워킹의 시대는 우리를 잠시도 가만두지 않는다. 어찌나 괴롭히는지 웹에 접속해 있거나 모니터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해도 다를 바 없다. 당장 창밖에 시선을 두고도 나는 지금 내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다. 불안, 현대인의 고질병.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감각을, ‘심심함’이라는 상태를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심심함’이란 얼마나 생산적인가. 심심해서 궁리하고, 심심해서 찾아보고, 심심해서 도모한다. 창밖을 내다보는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은 없는지 불안해하는 내가 참 가엾다.
뜨거운 창밖에서 불현듯, 어린 시절 여름방학을 떠올리고 말았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어도 아무 걱정이 없던 세계. 심심함으로 가득하던, 그리하여 눈에 닿는 것, 손에 집히는 것마다 발견이고 즐거움이던 세계. 지금은 이대로 있자. 심심한 채로. 밤이 되면 후회할 걸 알면서도 두 손을 내려두고 가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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