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억울한 죽음 진상 밝히려 선택… 눈 감았던 것들에 관심 가져야"
이철규 열사 사건보며 결심
세월호 참사때 가장 힘들어
법의학 하려면 전문의 따야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Mortui Vivos Docent)'.
의학도들에겐 너무나 유명한 격언이다. 이를 몸소 실천하는 주인공이 있다. 저명한 법의학자인 이호 전북대 의과대학 교수다.
법의학은 의학을 기초로 법률적으로 사실관계를 연구하고 감정하는 학문이다. 주로 변시체의 사법부검을 통해 사인을 규명하거나 유전자(DNA)증거를 채집한다. 대중에겐 다소 생소한 면도 있다. 이호 교수는 "법의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법학인지 의학인지 헷갈려 할 정도"라며 "법대에 있는 학문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법의학을 하려고 해도 전문의는 따야 한다"고 웃으면서 강조했다.
법의학자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1989년, 본과 1학년이었던 이 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던 조선대 고(故) 이철규 열사가 광주 수원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을 목도하게 된다. 부검 결과 사인은 '익사 추정'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이 교수는 "정황상 고문사가 의심되었기 때문에 부검을 했지만, 결국 익사라고 발표됐다"며 "그 사건을 보고 저는 향후 이런 억울한 죽음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당시 '의과대학을 열심히 다녀서 이런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부검의가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법의학을 한 지는 올해로 26년째다. 법의학자로서 살아온 삶의 흔적은 그의 이력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교수는 대한법의학회 학술이사와 편집위원장,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비상임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경찰청 과학수사 자문위원, 대검찰청 법의학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학자로서 보낸 세월의 깊이 만큼 기억에 오랫동안 남은 사건도 있다. 바로 미제사건이다. 이 교수는 가정 내 불화로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아이 사건을 떠올렸다. 이 교수 입장에서 마음 아픈 사건이다. 그는 "그 아이가 학교에서 연 동시대회에 '단풍'이라는 시를 내서 상을 받았는데, 내용을 보고 '시인이 지나갔나보다' 싶었다"며 "그런데 심리학자의 얘기를 들어보니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내적으로 갈등이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낸 시였다. 그것을 우리가 알았다면 그 애의 가정환경을 들여다보고 심리적인 접근도 했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세월호 사건을 꼽았다. 이 교수 스스로도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할 정도다. 그는 "세월호에서 인양됐던 시신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분들 잘못으로 돌아가신 게 아니지 않는가"라며 "부패나 훼손이 심한 시신을 볼 때보다 더 많이 힘들다"고 밝혔다. 이어 "그럴 때마다 법의학자들의 어떤 역할을 해야 할 지를 생각한다"며 "'우리가 애써 눈 감았던 것들이 이제 터진 것이다.사회가 앞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방송매체를 통해 법의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자주 출연해 얼굴을 알렸다. 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TvN '유퀴즈'와 '알쓸인잡'이 대표적이다. '알쓸인잡'에서는 고정 패널로 활동했다.
그는 "'그것이 알고 싶다'는 법의학자로서 자문에 응하는 것의 의무라고 생각해 출연했다"며 "제가 수사기관은 아니지만 대중이 공공쪽으로 의견을 물어본다면 부검한 사람으로서 의견을 내놔야 한다"고 밝혔다. 예능 출연과 관련해선 "학교에서 추천을 해서 유퀴즈를 나갔고, 그러다가 알쓸인잡을 나가게 됐다"며 "법의학을 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출연하게 된다"고 밝혔다. 이어 "출연여부는 주로 '집 사람'이 결정한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엔 TV조선 '거인의 어깨'에 나와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를 공감하는 발언을 전하고 책을 선물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프로그램에서 만났을 때, 오히려 그 사람이 거인 같았다"며 "고통을 혼자 해쳐나오고, 지금은 범죄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사단법인까지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는데, 갑자기 녹화장소로 갈 때 길에서 본 능소화가 생각났다. 그래서 관련 설화를 얘기했다"고 말했다.
설화는 바닥을 기던 능소화가 소나무의 어깨를 빌려 하늘끝까지 꽃을 피워내 구름을 형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이 교수는 프로그램에서 이 설화를 얘기한 뒤 "우리가 소나무가 되고 어깨를 내줬으면 좋겠다. 진주(필명) 씨가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이라고 전했다.
이런 내공 있는 멘트의 근원은 그의 독서량에 있는 듯하다. 그는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박식하고, 깊이 있는 멘트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교수는 세네카의 '행복론', 그리스 고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키케로의 '노년에 대하여'를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고 했다. 최근에는 고전도 강의하고 있다.
이 교수는 "다른 분과 비교하질 않으니까 독서량이 많은 지는 모르겠다"며 "다만 제일 행복할 때는 주말에 읽기 위해 신청한 책을 금요일에 받을 때"라고 밝혔다. 이어 "가끔 다 읽지 못하고 그 다음주 월요일을 맞이하지만, 책을 항상 가까이하려고 하고, 읽은 내용을 얘기하는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법의학자로서의 삶만을 추구하진 않았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추구했다. 그는 "존경하는 스님에게 '아호'를 정해달라고 했는데 '소요(逍遙)'를 말씀하셨다"며 "'꺼리낌없이 거닐며 돌아다닌다'는 의미인데, 무엇에도 거리낌없이 걷다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돕고, 다시 제 길을 걸어가는 여유로운 삶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세희기자 saehee0127@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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