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곳곳 공영방송 독립성 파괴…술수는 ‘미디어 포획’

한겨레 2024. 8. 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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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전망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과 김태규 위원이 지난 7월31일 취임 직후 정부과천청사 방통위에서 공영방송 이사 선임안 의결을 위한 전체회의를 하고 있다. 방통위 제공

공영방송은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영방송과 달리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자유를 표방하며 정부로부터도 일정 수준 이상의 편집권 독립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매체다. 이런 공영방송은 권력 감시기능에 충실하고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까다로운 사안도 다루기에 현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제도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영국 등 서구 민주주의 국가의 자랑이었던 공영방송이 잇따라 약화되는 추세다. 정부가 편집 독립권을 보호해온 ‘방화벽’을 훼손하며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반발하는 언론인에 대한 징계와 소송을 남발하고 있다. 예산 감축과 인력 이탈, 재정기반 잠식과 민영화 추진 등 보도의 질이 저하되고 조직이 형해화되는 현상은 전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목도되고 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가 고안한 ‘포획’(capture)이라는 개념이 있다. ‘규제 포획’은 공무원들이 자신들이 감독해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 동화돼 ‘알아서 기며’ 국민의 이익을 망각하는 현상이다. ‘미디어 포획’은 언론이 권력 감시 기능을 망각하며 특정 정치세력 등의 입장에 동화돼 ‘알아서 기는’ 상황을 말하는데, 최근 에든버러대의 케이트 라이트 등은 미국 등 전세계 공영방송의 ‘미디어 포획’ 비교연구를 진행하며, 역사와 문화, 정치 제도가 상이한 여러 나라의 공영방송 몰락이 기괴할 정도로 빼닮았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들이 밝혀낸 ‘미디어 포획’ 비법을 공개한다.

첫째, 규제와 제재 포획이다. 기존 공영방송 거버넌스 제도상의 허점을 활용해 부당한 인사를 강행하고, 임명된 인사들은 최대한 버티기를 감행한다. 사법기관의 수사와 잦은 소송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사측, 즉 정부의 도·감청도 언론인들의 자기검열을 유도하는데 매우 유용한 수법이다. 둘째, 담화 포획이다. 공영방송 탄압에 유리한 담론을 조성하기 위해 소셜미디어 논객 등 공영방송 외부에 있는 극우 논객을 공영방송에 출연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트럼프가 미국 공영방송 고위직에 임명한 인사들이 ‘언론계 안에 외국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며 공포감을 조성했던 것이 이런 맥락이다. 이들의 말을 받아쓴 저질, 마이너 매체의 기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잇따라 인용되며 공영방송 탄압의 양분이 된다.

셋째, 자원 포획이다. 잇따른 예산 삭감과 정리해고 뒤 인력 미충원으로 조직을 약골로 만든다. 수신료 삭감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는 시청률 하락과 광고 수입 감소 등으로 이어진다. 자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지 않고 관료적 규제를 늘려 언론인들의 업무 효율을 낮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악화된 재정은 향후 민영화의 근거로 삼는 데 유리하다.

다양한 방식의 포획이 맞물리며 공영방송 언론인들은 극심한 과로와 위기감, 두려움을 겪게 된다. 자원이 줄어드니 격무에 시달리고,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된다는 두려움마저 더해 싸울 힘을 잃는다. 일부 정치권이나 시민단체 등에 상황을 알려내며 연대를 시도하거나, 내부에서 노동조합 등을 통해 변화를 시도하는 이들도 있지만 지친 상당수 언론인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떠나는 길을 선택하고, 남은 이들이 제작하는 보도의 질은 더욱 떨어진다. 이렇게 포획은 완성된다.

연구자들은 이런 ‘미디어 포획’의 공식을 보여주며 공영방송 탄압이 특정 국가, 특정 지도자를 넘어선 전세계적인 민주주의의 위기와 연결된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런 ‘미디어 포획’은 보수 우파 정권 집권시에 자주 목도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오바마 정권 말기 ‘미국의 소리’ 의사결정 구조를 정권이 임명한 사장으로 일원화한 것은 향후 트럼프 정권의 편집권 파괴를 가능케 한 계기를 제공했다.

여러모로 한국 상황이 투영되는 이 연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었던 지점은 언론인의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미디어 포획’의 심리적 기제였다. 십년 넘게 고군분투했지만 이제는 싸울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고 토로하는 공영방송 지인들이 눈에 밟혀서다.

서수민 교수

서수민 |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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