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파리 올림픽의 '명상 고수들'
2024 파리 올림픽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지요. 지난 4일 양궁 남자 개인 결승전 직전 대기실 장면이었습니다. 사진 왼쪽엔 김우진 선수와 임동현 코치가 앉아있고 맞은편에는 미국의 엘리슨과 코치가 앉아 있었지요. 화제가 된 것은 두 선수의 시선이었습니다. 엘리슨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어 대기실 TV에 비춰지는 이우석과 플로리안 운루(독일)의 동메달 결정전을 시청하고 있었지요. 반면 김우진은 양손을 모으고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마치 명상에 빠진 것처럼 보인 것이지요. 사선에서도 무덤덤한 김우진은 대기실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결과는? 이미 우리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슛오프까지 가는 접전 끝에 김우진의 화살은 10점 원 안쪽, 엘리슨의 화살은 살짝 원 밖에 꽂혔지요. 금메달과 은메달을 가른 두 화살의 차이는 불과 4.9㎜. 인터넷에는 이 사진에 대해 ‘보기만 해도 숨 막힌다’ ‘가림막이라도 하나 놔주지’ 등의 댓글이 달렸지요.
사실상 2016년 리우 올림픽 이후 8년만에 정상적으로 열린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여러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과거엔 중요 경기가 있으면 선수들의 고향 마을에서 주민들이 응원전을 펼치는 모습이 TV에 자주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오히려 선수들의 가족들이 파리 현지를 찾아가 주먹밥을 싸주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눈에 띄는 차이점은 과거 주요 경기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던 ‘정신력’이란 단어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당시 ‘정신력’이란 단어는 ‘안 되면 되게 하라’ 혹은 ‘악으로 깡으로’ ‘투지(鬪志)’ 같은 의미였지요. 우리가 그만큼 여유가 생겼고, 정신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것 아닌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지난 연말부터 격주로 ‘마음을 찾는 사람들’이란 문패로 명상하는 분들을 연쇄 인터뷰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할 무렵 체육계를 통해 명상하는 운동선수들을 물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명상을 한다는 선수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를 보니 우리 젊은이들은 ‘명상’이란 이름을 붙이건 아니건 이미 명상의 방법을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리즈를 진행하면서 명상 전문가들로부터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다양한 방법과 기술이 있지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과거와 미래로 치닫는 마음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것이 바로 명상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선수들은 ‘명상 이라는 이름을 붙이든 아니든 ‘명상 고수(高手)’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력’이란 이름의 부담감, 상대를 무찔러야 한다는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다루면서 즐기는 방법을 깨달은 것이죠.
김우진 선수는 3관왕을 이룬 후에 이런 말도 했더군요. “오늘 메달은 오늘까지만 즐기겠다. 내일부터는 다 묻어두겠다.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겠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가 딴 메달에 영향 받지 않고, 나의 원래 모습을 찾아 계속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 어린 선수들에게 해주고픈 말이 이거다. 메달 땄다고 (자만에) 젖어있지 말라. 해 뜨면 마른다.” 김 선수의 ‘나의 원래 모습을 찾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명상 전문가들이 강조하는 내용 그대로였습니다.
역시 여자 양궁 3관왕 임시현 선수는 경기 전 녹화한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긴장이 많이 되긴 하는데, 제가 연습하고 준비한 기간이 있잖아요. 컨디션이 안 좋아도 훈련한 것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 훈련량을 믿고 합니다. 지금부터 저의 첫 올림픽이 시작됩니다.”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스스로 쌓아온 노력을 믿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올림픽 중계를 보면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은 “생각을 비워야 합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격, 펜싱, 양궁 등 대부분 종목에서 주로 선수 출신 해설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했지요.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겠지만 ‘생각을 비우라’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명상 훈련 방법 중에는 수식관(數息觀)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들숨 날숨에 숫자를 매기면서 생각을 줄이고 주의를 호흡에 붙드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불과 10까지 헤아리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그 사이사이에 온갖 생각이 침투하거든요. 양궁을 예로 들면 바로 직전에 쏜 화살이 10점을 벗어났는데 상대 선수는 10점을 쏘아서 앞서간다면 그 불안을 어떻게 떨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이 화살에 집중해야 새 경기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젊은 선수들은 그것을 해내더군요.
일론 머스크를 비롯해 세계인들을 반하게 만든 사격의 김예지 선수도 명언을 남겼습니다. “총을 조준할 때는 머릿속으로 온통 제가 해야 할 행위만 생각한다. 실탄이 총구를 벗어나는 순간, 그건 이미 제 손을 벗어났고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니 ‘다시 시작, 다시 시작’ 이렇게 생각한다.” 바로 그 집중의 순간에 세계인들이 매혹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올림픽도 종반을 향하고 있습니다. 당초 금메달 5개·종합 순위 15위 목표를 훌쩍 초과 달성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과거처럼 순위가 국력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되는 것처럼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 MZ세대 선수들이 각자 마음을 다스리고 즐기면서 이룬 결과라는 점이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선수들이 보여준 긍정적인 자세가 우리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까지 선수들이 준비한 훈련량을 스스로 믿고 기량을 남김없이 발휘하길 응원합니다.
김한수의 오마이갓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80904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