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엔 가고싶어” 별이 된 유망주의 꿈, 옛 동료들이 이뤄줬다 [방구석 도쿄통신]
일본 고교야구 꽃 고시엔 대회 오늘 개막
15년만 출전하는 나가노고, 작년 숨진 옛 동료 추억
”녀석이 천국에서 등 떠밀어줘, ‘힘내라’ 소리 들렸다”
재일한국계 교토국제고도 2년만 본선 출전
한국은 일본을 너무 모르고, 일본은 한국을 너무 잘 안다.
일본 내면 풍경, 살림, 2014
국내 언론 매체들은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일본의 이야기를 주로 정치나 경제, 굵직한 사회 이슈에 한해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일본에서 교환 유학을 하고, 일본 음식을 좋아하고,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기자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 일본에서 진짜 ‘핫’한 이야기를 전달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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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개장 100주년을 맞이한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市) 야구 구장 고시엔(甲子園)에서 오늘(7일) 일본 ‘고교 야구의 꽃’이라 불리는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이른바 ‘여름 고시엔’이 개막합니다. 여름 고시엔은 대학은 물론 현지 프로팀 스카우트들이 총출동해 차세대 야구 스타를 감별하는 프로 데뷔 ‘등용문’으로 꼽힙니다. 미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는 오타니 쇼헤이(30), 다르빗슈 유(38), 기쿠치 유세이(33) 등도 모두 고교 시절 고시엔 땅을 밟았죠.
매년 고시엔에는 47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예선에서 입상한 49교가 출전합니다. 도쿄·홋카이도는 두 팀씩 출전하고, 나머지는 지역 1위를 차지한 팀만 본선 출전권을 얻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 구장인 고시엔의 100주년인 만큼, 올해 출전 고교들에 현지 야구팬들의 관심이 유독 쏠리고 있습니다. 우승 경험이 있는 ‘전통 강호’들부터, 예선에서부터 파란을 일으키며 개교 이래 최초로 출전 티켓을 따낸 학교도 있습니다.
2021~2022년 연속 출전해 고시엔에 한국어 교가를 울려 퍼뜨린 재일(在日) 한국계 교토국제고도 2년 만에 본선 출전교 목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21년 4강에 올랐던 교토국제고를 탈락시킨 나라현 지반게쿠엔고(智弁学園高)도 나란히 출전권을 따내, 교토국제고의 설욕전이 성사될지도 주목할 포인트입니다.
출전교 중 개막을 앞두고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곳은, 사상 두 번째이자 15년 만의 출전인 나가노현 나가노니혼다이가쿠고(長野日本大学高·이하 나가노고)입니다. 나가노고가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9대0으로 승리, 고시엔 본선 티켓을 거머쥔 지난달 27일 경기장 관중석엔 야구 유니폼을 입은 앳된 얼굴의 한 고교생이 앉아 있었습니다. 중학생 시절부터 지역 유망주로 이름을 알린 아라이 다이키(荒井大輝)군이었는데요. 부모님 품 속 영정 사진으로나마 경기장을 찾은 그는, 미소를 띤 얼굴로 옛 동료들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시나노마이니치신문 등 지역 언론에 따르면, 아라이군이 야구공을 처음 잡은 건 초교 4학년 때였습니다. ‘일본 제일의 투수가 되겠다’는 그의 꿈을 위해 아버지가 집 차고에 연습용 네트를 설치해줬고, 아라이군은 매일같이 피칭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중학생이 되곤 지역 청소년 야구팀에 입단했어요. 소심한 성격 탓에 마운드에서 눈물을 흘리는 등 적응에 애를 먹었지만, 부모·코치·동료들의 격려로 용기를 키웠습니다. 그렇게 당당히 팀 간판 선발투수로 자리 잡은 아라이군에겐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2020년 6월, 중학교 2학년이었던 아라이군은 갑자기 “고관절이 아프다”며 통증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고관절은 골반과 다리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관절로, 온몸을 비틀며 공을 던지는 투수에겐 ‘코어 힘’을 지탱해주는 생명과도 같은 부위입니다. 처음엔 ‘스트레칭이 과했다’는 생각에 며칠 쉬기로 했지만,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고 야구부 활동도 중단해야 했습니다. 병원을 찾은 아라이에게 의사는 “백혈구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했습니다. 급성 림프성 백혈병. 열넷의 나이였습니다.
아라이는 투병 생활 중에도 야구의 꿈을 놓지 않았고, 치료·재활에 전념해 입원 1년 4개월째 된 날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2022년 4월 나가노고에 진학했어요. 치료 문제로 야구부에 곧바로 지원하진 못했지만, 먼저 입단한 청소년팀 시절 동료들에게 “함께 고시엔 땅을 밟자”고 약속했습니다.
그해 7월 가신 줄 알았던 병마가 다시 찾아왔고 증상은 4개월 지나서야 완화됐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재차 재발했습니다. 골수이식을 받고 7월쯤 퇴원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 이번엔 “백혈병 세포가 뼈에도 전이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완치가 어려울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도 함께였습니다.
당시 아라이는 체내에서 혈액을 공급하지 못해 주 2회 이상 수혈해야 했고, 뼈가 급속도로 약해져 가벼운 동작에도 금이 가거나 부러지는 일이 다반사가 됐습니다. 그의 의식이 희미해진 건 지난해 11월 자택에 머무르다 별안간 왼쪽 허벅지 뼈가 부러진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라이가 다시 병원에 입원한 뒤 지난해 12월 16일, 그의 중학생 시절 동료들이자 나가노고 야구부 선수단이 병문안을 왔습니다. 이들은 ‘극복해라’라고 적힌 야구공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이 공은 격리 병동에 있던 아라이군 대신 부모의 손을 통해 그에게 건네졌어요. 아라이군의 아버지는 “야구공을 (아라이군 손에) 쥐여줬을 때, 분명 잠시나마 의식을 찾고 눈을 떴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라이군은 친구들이 돌아가고 하루 지난 지난해 12월 17일 숨을 거뒀습니다. 향년 17세였습니다.
아라이의 휴대전화에선 생전 적어놓았던 유서가 발견됐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이제 오래 못 살 것’이라고 얘기해줬어요. 눈물이 멈추지 않고 너무 불안해요. 하지만 우는 것보단 웃는 삶이 낫잖아요. 마음을 다잡을게요.” “야구를 마음껏 하고 싶었어. 효도도 더 하고 싶었다. 너무 후회되고 미안해.” “그래도 되돌아보면 행복한 삶이었다.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고마워요.”
아라이군과 중학생 때부터 동고동락한 나가노고 야구부 다무라 가이토(18)군은 고시엔 티켓을 따낸 뒤 “녀석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다른 동료 고야마 다이토(18)군도 “‘다이키를 위해’라 생각하며 뛰었다. 고시엔에 가게 됐다고, 꼭 전해주고 싶다”고 했죠.
2022년 고교 입학식을 앞둔 아라이군은 친구들에게 ‘야구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때 친구들은 ‘이왕 그렇다면 고시엔에 함께 가자’고 다 같이 약속했어요. 다무라군은 당시를 떠올리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아라이가 ‘간바레(がんばれ·힘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천국에서 등을 떠밀어줬다”고 했습니다. 다른 동료들도 “끝까지 병에 맞서 몇번이고 일어난 아라이에게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야구를 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아라이를 통해 배웠다”며 옛 동료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나가노고는 오는 13일 아오모리현 대표이자 올해로 12번째 출전인 지역 강호 아오모리야마다고(青森山田高)와 다음 토너먼트 진출권을 놓고 승부합니다. 고교 청춘들만의 열정과 감동이 오가는 고시엔 소식을 앞으로도 자주 전해드리겠습니다.
8월 7일 50번째 방구석 도쿄통신은 오늘 개막하는 ‘일본 고교 야구의 꽃’ 고시엔 대회, 그 고시엔을 꿈에 그렸지만 별이 되어버린 한 고교생의 사연을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주에도 일본에서 가장 핫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48~49편 링크는 아래에서 확인하세요.
지자체장 비리 스캔들 넉달째, 내부고발자가 주검으로 발견됐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7/24/2S65ZFQSNVCADIXNBGT4AOLQD4/
기시다파 자진 해산 앞두고, 총리는 ‘고뇌의 병나발’ 불었다 ☞ chosun.com/international/japan/2024/07/31/K2VQZXMP5JHTHB4BWE22SDMKD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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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한주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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