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현장을 가다/조은아]“기계 대신 손맛으로 구두 만든다”… 패스트 패션 시대, 佛 ‘슬로 패션’

조은아 파리특파원 2024. 8. 6.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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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역사 佛‘벨루티’ 공방 가보니
“손맛으로 미세 조정해야 만족해”… 속도의 시대에 느린 수작업 제작
中 불경기 럭셔리 기업 매출 감소… 파리 올림픽 맞아 ‘장인 정신’ 홍보
지나치게 상업적인 이미지 걸림돌… 원단 조각 파는 온라인 플랫폼도
2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남성복 브랜드 ‘벨루티’의 한 공방에서 수공업자들이 신발을 손수 제작하고 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2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대표적인 번화가 샹젤리제 거리 뒤편 골목. 화려한 대로를 벗어나 조용한 골목 속에 숨은 오래된 건물에 들어갔다. 강한 염료와 오래된 목재의 향이 풍겨 왔다. 프랑스 건물들의 특징인 좁은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건물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나무 수납장에 나무 신발 모형 수백 개가 빽빽이 진열돼 있었다.》
조은아 파리특파원
이곳은 약 130년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남성 의류 브랜드 ‘벨루티’의 공방이다. 신발 모형들은 맞춤형 구두를 의뢰한 고객들의 발 형태였다. 모형 표면엔 각각 숫자와 이름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장미셸 카살롱가 벨루티 구두 아틀리에 책임자는 “모형에 적힌 숫자와 이름은 고객 정보”라며 “이 모든 정보를 자료로 저장해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방 대여섯 개를 갖춘 주택 같은 공방에선 방마다 구두가 단계별로 제작되고 있었다. 장인 20여 명은 방마다 네다섯 명씩 앉아 자신의 업무에 몰입하고 있었다. 팀별로 각자 구두의 천을 손수 물감으로 칠하거나, 염색된 가죽을 바느질로 구두 위에 입혔다.

프랑스 남성복 브랜드 ‘벨루티’가 제작한 2024 파리 올림픽 프랑스 선수단의 개회식 복장. 벨루티 인스타그램 캡처
이날 파리시는 2024 파리 올림픽을 찾은 내외신 기자들을 경기장 대신 벨루티 공방으로 불렀다. 벨루티가 파리 올림픽 개회식 때 프랑스 선수단 의상을 제작한 점을 계기로 프랑스 정통 명품을 널리 알리기 위한 의도다.

● 편한 구두는 손에서 태어나

1895년 이탈리아 출신 알레산드로 벨루티가 설립한 벨루티는 1900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벨루티란 상호를 사용한 것은 1928년 창립자의 아들인 토렐로 벨루티가 파리 몬타보 거리에 ‘벨루티, 명품 수제화’란 간판을 걸고 매장과 공방을 열었을 때부터였다. 대를 이어가고 있는 이 브랜드는 1994년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에 인수됐다.

이제 벨루티는 파리 시내에서 구두 공방과 의류 공방 각각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구두는 한 켤레 제작에 보통 80시간이 투입된다. 고객이 주문한 뒤 완성품을 받아보려면 대략 9개월에서 1년까지도 기다려야 한다.

제작 속도가 느린 이유는 100% 수작업 맞춤형으로 제작되기 때문이다. 요즘 중국 ‘알테쉬(알리·테무·쉬인)’로 대변되는 ‘패스트 패션’의 속도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느리다. 빠르게 소비하고 버리는 패션 브랜드가 넘치는 시대에 벨루티는 왜 수작업을 고수할까. 현장에서 ‘인공지능(AI) 시대에 왜 기계로 작업을 하지 않는가’란 질문에, 카살롱가 책임자는 “인간다움이 우리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구두를 기계로 빠르고 정확하게 찍어 내더라도 소비자들은 결국 장인이 직접 ‘손맛’을 담아 세심하게 조정해 주길 바란다는 얘기다.

“의사가 사람 몸을 스캔하듯, 우리도 손님의 발을 스캔해 정확한 크기의 구두를 제작할 순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맞는 크기의 구두가 제작돼도 손님들은 우리가 손으로 미세한 차이를 정교하게 조정해 주길 원해요. 인간다운 기술이 기계로 대체되면 손님들이 실망할 겁니다.”

장인들의 손맛은 양복 제작 과정에도 묻어났다. 파리 6구 고급 백화점 근처에 있는 벨루티 신사복 공방 역시 양복을 수작업으로 제작한다. 양복 재단사들은 소비자 체형을 측정할 때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거나 어깨를 구부리는 등의 미세한 습관까지 포착해 옷 디자인에 반영했다. 매 순간 편안한 양복을 만들기 위한 배려다.

옷 소재를 고를 때는 재단사와 소비자가 함께 색상과 무늬가 제각각인 다양한 천들이 전시된 쇼룸으로 들어간다. 재단사는 소비자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추천한다. 이때 고객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후에 따라서 적합한 섬유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방문에 동행한 파리시의 한 자원봉사자는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천천히 정성을 다하는 장인 정신이 프랑스 패션의 가치로 남을 것”이라고 평했다.

● 위기의 명품 브랜드, CEO 교체도

이날 파리시가 이례적으로 벨루티 공방 현장 취재를 마련한 건 ‘명품 패션 기업’들이 최근 겪고 있는 어려움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프랑스를 포함해 세계 각국의 명품 패션 기업들이 전체적으로 실적이 줄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세계 소비자들이 럭셔리 구매를 줄이고 있는 게 가장 큰 원인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구찌, 발렌시아가, 입생로랑, 알렉산더맥퀸 등 럭셔리 브랜드를 거느린 프랑스 명품 그룹 케링의 주가는 올 상반기(1∼6월) 42% 감소했다. 하반기엔 영업이익이 30% 감소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케링의 프랑수아앙리 피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어려운 시장 환경에서 우리는 성장을 되찾기 위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올 상반기 카르티에 모기업 리치몬트의 중국 홍콩 마카오 매출은 27% 감소했다.

영국의 럭셔리 브랜드 버버리는 상황이 더 안 좋다. 지난달 공개된 1분기(1∼3월) 매출은 전년 동기에 비해 22% 감소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23%나 감소해 부진이 두드러졌다. 이에 따라 버버리는 조너선 아케로이드 CEO를 취임 2년 반 만에 교체했다. 앞으로 코치와 지미추 CEO를 맡았던 조슈아 슐먼이 버버리를 이끌게 됐다. 또 버버리는 배당금 지급도 중단할 예정이다.

그나마 실적이 괜찮은 브랜드는 초고가의 부유한 소비자를 공략하는 곳들이다. 예컨대 에르메스는 오히려 상반기 매출이 약 13% 증가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명품들은 자존심을 접고 아시아 지역에서 과잉 재고를 해소하기 위한 대폭 할인 판매도 하고 있다.

● 남은 원단 판매 플랫폼도 등장

지나치게 상업적이란 이미지도 명품 브랜드엔 성장의 걸림돌이다. 젊은 세대들이 합리적 소비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친환경 소비를 중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명품 브랜드들은 재활용 소재를 활용하거나 제품 제작 과정에서 남은 원단을 저렴하게 파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클로에는 ‘클로에 크래프트’란 개념을 도입했다. 클로에의 주요 상품인 시그니처 토트백과 스니커즈, 데님 등에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는 방식이다. 클로에 신발의 밑창은 케냐 해변에서 발견된 슬리퍼들을 재활용하는 사회적 기업 ‘오션 솔’과 함께 제작했다.

프랑스 LVMH그룹은 그룹 산하 디올, 지방시, 루이뷔통 등 다양한 아틀리에에서 수거한 데드스톡(남은 원단)을 재판매하는 온라인 플랫폼 ‘노나 소스’를 선보였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프라다도 버려진 어망으로 만든 재활용 나일론을 제품에 쓰고 있다. 영국 명품 알렉산더맥퀸의 세라 버턴 디자이너는 재활용 폴리에스터로 드레스를 만들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조은아 파리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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