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거는 용기 내줘서 고맙다고 말해요”

전지현 기자 2024. 8. 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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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전화’ 지키는 이들
‘SOS 생명의전화’의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는 김봉수 팀장(왼쪽)과 곽영철씨가 전화기가 설치된 서울 반포대교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 사진).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상담사로 일하는 김지혜씨. 한수빈 기자
한강 교량 20곳에서 운영
수리 기사가 매달 점검도
전문 상담사 24시간 대기
자살 위험 클 때 119 신고

35도가 넘는 찜통더위로 뜨거웠던 지난 1일, 서울 서초구 반포대교 위로 자동차 매연이 섞인 후끈한 바람이 불었다. 다리 위를 걷던 김봉수씨 얼굴엔 굵은 땀방울이 가득했다. 다리를 3분의 1쯤 지났을 때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난간에 ‘SOS 생명의전화’가 설치된 곳이다. 가방에서 소독용 알코올과 마른 행주를 꺼냈다. 가로 30㎝, 세로 40㎝ 크기의 전화 부스 구석구석을 정성스레 닦았다. “보기에 깨끗해야 수화기를 들 마음도 생기지 않을까요?”

‘지금 힘드신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긴급 상담 전화기는 비관적인 마음으로 다리를 찾는 이들을 위해 2011년부터 한강 다리에 설치됐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현재 한강 교량 20곳, 강원 춘천 소양1교에 SOS 생명의전화 총 75대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 재단의 위탁을 받은 ‘한국생명의전화’가 365일 전화 상담을 기다린다.

다리에 설치된 전화기는 뙤약볕과 비바람, 폭염과 혹한에 그대로 노출된다. 한국생명의전화 상담사이자 팀장인 김씨가 한 달에 한 번, 한강 교량을 모두 돌며 상태를 점검하는 이유다. 전화기의 버튼은 두 개다. ‘119’ 버튼은 종합방재센터로 연결된다. ‘생명의전화’ 버튼을 누르면 전문 상담사가 받는다.

김씨는 전화기 청소를 끝낸 뒤 수화기를 들고 잡음이 있는지, 신호음이 잘 들리는지, 전화기 위치 정보가 제대로 표시되는지 등을 확인했다. 반포대교에 설치된 전화기만 4대(상·하행 각 2대)다. 이날 반포대교 전화기를 돌아보는 데 1시간쯤 걸렸다. 점검날이면 하루에 다리 4~5곳을 돌아야 한다.

고장이 확인되면 수리를 해야 한다. 전기수리기사 곽영철씨(47)는 5년째 생명의전화를 수리하고 있다. “버튼이 안 눌리거나, 소리가 안 들리거나. 전화기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 있다 보니 술 취한 사람이 선을 끊어놓고 갈 때도 있어요.”

곽씨는 장마와 폭염이 반복되는 여름이나 배터리가 방전되기 쉬운 겨울에 고장이 잦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전화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곽씨는 “한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얘길 들으면 이전보다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누군가가 다리에서 생명의전화를 걸면 상담실로 연결된다.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 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상담사들이 24시간 전화를 기다린다. ‘전화상담 양성교육’ 등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다.

김지혜 상담사는 ‘기다리는 것’이 자기 일이라고 했다. 10년 전부터 상담사로 활동해온 그는 “처음부터 자기 이야기를 하는 분은 많지 않다”며 “말에 앞서 우는 분들이 많아 다 울 수 있게 기다리고, 괜찮다, 얼마나 많이 힘들었냐, 충분히 울어도 된다고 말하곤 한다”고 했다. 자살 징후가 뚜렷해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면 119에 신고한다.

상담 전화는 봄·가을에 더 많이 온다고 했다. 대학수능시험 때는 예외다. 수능 전후는 상담사들이 가장 긴장하는 시기다. 김 상담사는 “초기에는 장난 전화도 많이 왔는데, 지금은 위기 상황에 전화할 수 있는 전화기라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며 “이젠 위기 상담 전화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2021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위기 상담 1474건과 119 구조 502건이 생명의전화를 통해 이뤄졌다. 매년 남성이 50~60%, 여성이 20%, 성별불명이 10~20% 정도다. 연령대별로는 20대가 20~30%로 가장 많았다.

김 상담사는 한강을 건널 때마다 다리 위 전화기를 살핀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한강과 죽음이 쉽게 농담처럼 연결돼 소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을 겪었지만 상담 전화를 받는 건 여전히 긴장되는 일이라는 김 상담사는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에게 꼭 전하는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전화를 건다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행동이라 생각해서, 전화 걸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곤 한다”고 했다. 이어 “지금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지만, 이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응원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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