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내게 우선하는 가치
하늘이 높고 볕이 쨍했던 늦여름으로 기억한다. 수업이나 다른 업무가 없던 금요일 오후라, 모처럼 학교 밖으로 나가 늦은 점심 겸해 커피와 빵을 먹고 오기로 했다. 노트북도 챙겨 룰루랄라 아랫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려야 할 곳을 한 정류장 앞둔 사거리에서였다. 신호변경 직전 기사님이 다급히 차선을 변경하시더니 좌회전을 시도했다. 원래대로라면 직진해야 했는데 얼마 전부터 시행되던 노선 전면 개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혼동하신 듯했다. 무리해서 모퉁이를 돌던 우리 버스는 옆 차선에서 좌회전하던 화물차량과 이상한 각도를 만들어냈고 다음 순간 ‘쿵’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이 미처 소리를 지르기 전에 전면의 유리창이 일부 깨지며 버스가 멈춰 섰다. 경미하긴 했으나 추돌사고였다.
그 무렵 지역 거주 2년째였던 나는 그새 경험한 버스 운행과 관련해 불만이 많았다. 평소 주로 이용한 구간은 직선대로였으며 커브나 비탈이 거의 없었음에도 종종 비포장 산길의 승차감을 느꼈다. 과속방지턱에서 속력을 내는 바람에 의자 위에서 몸이 붕 떠올랐다가 쿵 엉덩방아를 찧은 적도 있었다. 한번은 하차를 위해 대기하던 중 급정차로 넘어졌다. 기사님은 승객이 괜찮은지 살피기에 앞서 “미리 나와 있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라며 화부터 내셨다. 당황해 “죄송합니다” 하고 일단 내렸으나 분했다. 일전에 하차 버튼 눌렀음에도 세워주지 않아 항의했을 때엔 왜 미리 문 앞에 나와 있지 않았냐며 꾸지람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터프’한 운행은 대도심 버스에 비해 서 있는 승객이 적은 좌석버스 특성과 관계될 수도 있을 성싶었고, 과중한 업무나 배차 간격의 문제 또한 존재할 듯했다.
생각난 김에 이제껏 품어왔던 불만을 민원게시판에 써야지 했다. 그렇게 노트북을 펼치고 한참 적다가 가만히 생각하니 아까 그 기사님은 운전이 거칠다거나 불친절하지 않았다. 느리게 승하차하는 승객을 재촉하지 않았고 과속방지턱에서 속력을 높이지 않았다. 사고는 내가 지적하려던 지점들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노선 개편으로 인한 혼선 때문에 발생했다. 이는 다른 성격을 지닌 별개 사항이었다. 그러나 만일 현시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짐작건대 운영진 측은 운행 관행을 전반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해당 날짜에 사고를 낸 운전자 1인에게 책임을 더 묻는 쪽으로 대처할 듯했다.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병폐가 이슈화되면 때마침 그 시점에 걸려든 누군가를 문제의 원흉으로 몰고가 중하게 벌함으로써 마치 해당 사안이 해결된 듯 보이게 하려는, 처벌 중심의 손쉬운 사회정책들에서 봐왔듯 말이다. 승객과 화물차량 운전자의 안전부터 확인한 후 경찰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사고 내면 안 됐는데 큰일났네”라고 혼잣말하던 기사님의 황망한 표정이 떠올랐다. 올리려던 글을 지우고 게시판을 닫았다.
유리가 깨졌음에도 앞 좌석의 나를 포함해 몇 안 되던 승객 중 아무도 다치진 않은 듯했다. 팔꿈치가 따끔거려 미세한 파편이 박혔나 했더니 벌레 물린 자리였다. 처음 겪은 자동차사고에서 상처를 입지 않았으니 그걸로 됐지 싶었다. 민원을 제기하고픈 마음이 재차 일지 않도록, 버스와 관련해 새로 만들어질 좋은 기억들이 과거 난폭운행의 기억들을 덮어가길 바랐다. 무엇보다 기사님이 그날 사고로 인해 직장에서 많이 힘들어지지 않길 소망했다.
당시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말했다.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글을 올리려다 지운 것에는 동의를 못하겠다고. ‘혹여나 발생할지 모를 피해’의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헤아리며 망설이면 어떤 관행이든 개선해나가기 어렵다고. 그 말씀은 맞았다. 다만 내겐, 한 사람이 과녁으로 지목되어 자기 과오에 비해 과도한 비난이나 불이익을 받진 않도록 하는 것이 관행을 바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대의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다. 여전히 그렇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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