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기억에 남는 생일
천상병 시인은 ‘생일 없는 놈’이란 시를 남겼다. 음력 설날에 태어났기 때문에 쉰두 해 동안 한 번도 생일상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제사 모실 생각에 온 마음이 팔렸고 시인은 시인대로 생일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개인사에서 특별한 날이 생일인데 쉰두 해 동안 생일상을 받아보지 못했다고 하니 슬픈 일이다. 시인을 위해 생일 밥상을 차려 줄 수 있다면 내가 차려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내 생일은 여름이다. 삼복더위 중에서도 가장 더운 중복을 전후해 생일이 돌아온다. 올해도 중복 날이 생일이었다. 생일상에 삼계탕은 덤이다. 복날 생일을 맞는 나는 복이 많다. 그래서 생일이 되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나를 낳으시느라 더위에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어머니가 계시는 빈독골 산소 위로 흰 구름 두둥실 떠가고 내 눈가엔 한동안 이슬이 맺힌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식구들 생일은 꼭 챙기셨다. 태어남에 대한 당신 나름의 감사 의식 같았다.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을 떠나 오직 태어나 준 것 하나로 늘 감사하는 듯했다. 어릴 적 나는 내 생일 날짜를 기억한 일이 없다. 더운 여름날 아침상에 흰쌀밥과 미역국, 생선 등이 올라와 있고 “오늘이 민주 네 생일이니 많이 먹어라”하고 말씀을 하시면 오늘이 내 생일이구나 했다.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 또래에는 여름이 생일인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왜 그럴까? 농촌에선 봄 여름을 지나며 열심히 농사를 짓고 가을에 추수해 거둬들인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마음도 넉넉해져 아무래도 부부가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러면 작은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 생겨나 열 달을 심장 뛰는 소리로 자라 여름에 태어난다.
바닷가나 섬마을에서는 조수가 가장 낮은 조금 때 바다로 조업을 나가지 않아 부부가 보내는 시간이 많다. 이때 아이가 생겨 한 마을에 생일이 같거나 비슷한 아이들이 태어나는데 이런 아이들을 일러 ‘조금새끼’라 했다고 한다. 기찻길 옆에서는 기적 소리에 잠이 깬 부부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많아 아이들이 많다고 하듯 그런 연유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이런 말이 돌던 그때가 좋았다. 물질적으로 풍요하진 않았지만, 정감 있는 시절이었다. 나 같은 여름 아이가 많고 조금새끼가 있고 기찻길 옆에서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이처럼 아이들은 부부의 사랑으로 태어난다. 우리나라에도 부부의 사랑이 푸른 파도처럼 넘쳐났으면 좋겠다. 사랑으로 대를 잇는 탄생은 신성하다. 사람이 태어나면 생일이 있듯이 우주 만물에도 생일이 있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물론이거니와 개천절, 회사 창립기념일, 개교기념일과 탄생을 기념하는 날도 있는 것이다. 국제신문사도 오는 9월 1일이면 일흔일곱 번째 창립기념일을 맞는다고 한다.
나는 기억에 남는 생일이 많다. 결혼한 첫해 아내와 같이 어머님이 차려준 생일상과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그 이듬해인가 처가에서 장모님이 차려준 생일상이 기억에 남아있다. 어머님은 생일상 앞에서 “내가 차려주는 마지막 생일상이다. 내년부터는 네 처에게 생일상을 받아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감사함에 울컥했다. 장모님은 당시 시골에서 처남과 함께 수박 농사를 지으셨는데 수박밭에서 제일 큰 수박을 따와 케이크 대신 수박에 큰 양초를 꽃아 생일을 축하해 주셨다. 수박을 숟가락으로 파먹은 후 소주를 부어 마셔 술이 불콰하게 오르며 기분이 상기되었던 기억이 난다.
노래방 기계에서 ‘생일’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온 동네 떠나갈 듯 울어 젖히는 소리 내가 세상에 첫선을 보이던 바로 그날이란다.” 직장 동료끼리의 회식 자리다. 마침 그날이 내 생일이라 동료들이 나를 위해 이 노래를 불러 주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그 밖에도 아내와 아이들이 챙겨준 생일, 친구 범지와 후배 도연이 챙겨준 생일 등등 기억에 남는 생일이 많다. 오늘이 입추이고 한 주 후면 말복이다. 남은 여름을 건강하게 보내고 감사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며 세상에 태어난 것을 축복해 주는 사람께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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