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의 ‘특별 당부’, 대통령이 답할 때 [홍성수 칼럼]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지난달 23일 국가인권위원회 후보추천위원회는 위원장 후보로 김진숙 변호사, 김태훈 변호사, 안창호 변호사, 정상환 변호사, 한상희 교수를 추천했다(한상희 교수는 사퇴). 대통령이 이 중 한명을 임명하는 절차만 남았다. 국가인권위원회 인적 구성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별다른 강제권한이 없는 기구에서 믿을 구석이란 인권에 대한 감수성과 전문성, 그리고 윤리성을 갖춘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국제인권공동체는 인권위원 구성에 대한 기준과 절차를 제안해왔고, 한국의 인권위 역시 여러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인선 절차를 마련하게 되었다.
국가인권위원장은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추천되고 지명되는 절차를 거쳐 임명된다. 2014년 인권위는 인권위원 선출 가이드라인을 정부·국회에 권고했고, 2016년에는 이를 반영한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아쉽게도 “국회, 대통령 또는 대법원장은 다양한 사회계층으로부터 후보를 추천받거나 의견을 들은 후 인권의 보호와 향상에 관련된 다양한 사회계층의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위원을 선출·지명하여야 한다”는 규정을 추가한 것이 전부였지만, 2018년 인권위는 이 조항의 취지를 십분 살려 위원 추천·임명 절차를 마련했고, 대통령실과 협의하여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운영했다. 그 후 대통령이 인권위원(장)을 지명할 때는 언제나 이 절차에 따라 공개모집, 서류심사, 면접심사를 통해 후보자가 추천되었다. 국제인권공동체가 수십년간 일관되게 제안해왔던 인권위원 인선 절차의 이상적인 모습이 한국에서 구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권의 정치적 성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할 문제가 아니었다. 인권위가 인권위원 선출 가이드라인을 마련한 2014년은 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고, 인권위 혁신위가 인권위원 인선 절차 혁신을 제안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한 이성호 위원장 재임 기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상 처음으로 인권위와 함께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인권위원장을 지명·임명하였다.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 역시 이러한 법과 관행을 존중하여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상임위원을 임명한 바 있으며, 이번 국가인권위원장 지명을 위해서도 인권위와 협의하여 후보추천위원회를 구성했다.
물론 형식이 내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자질 논란이 되고 있는 한 상임위원은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임명된 인물이다. 여러명이 모여 복수의 인물을 추천하는 특성상 부적절한 인물도 추천될 수 있고, 대통령이 이를 임명하면 잘 마련된 절차도 무용지물이다. 이번에 후보추천위원회가 추천한 인물 중에도 그 적격성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이들이 있다. “인권문제에 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있고 인권의 보장과 향상을 위한 업무를 공정하고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라는 법에 정한 최소한의 요건에 부합하는지조차 의심되는 인물들이다. 차별금지법이 “공산주의 혁명으로 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시대착오적이고 근거 없는 색깔론을 펼치거나, 양심적 병역거부, 수형자 선거권, 사형제, 낙태죄 등에 대해서 기존 인권위 입장에 반하는 행보를 걸어온 인물도 있고, 제주4·3사건을 부정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딴지를 걸어온 대표적인 인사도 있다. 국가인권위원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다.
이쯤 해서 인권위가 설립된 이유를 한번 되돌아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보편적 인권의 실현을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위시한 각종 국제규범을 제정하고 유엔 등 다양한 국제기구를 만드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인권의 이행을 위해서는 결국 개별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유엔이 짜낸 묘안이 바로 ‘국가인권기구’였다. 유엔의 ‘위성’ 같은 역할을 하는 ‘준국제기구’를 국가마다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세계 주요 국가에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되었고, 한국도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할 수 있었다.
그동안 국제인권공동체와 한국의 인권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발전시켜온 수많은 인권 원칙과 관행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자산이면서 인류 공동의 자산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국가인권위원장은 이런 역사를 계승하고 발전시킬 책무가 있으며, 그 책무를 이행할 수 있는 인물이 차기 위원장에 임명되어야 한다. 인사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국제사회의 오랜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인권위의 독립성을 잘 지켜나갈 인사를 선택해달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이제 대통령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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