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권 제한’ 시도에 분노 폭발한 고종과 명성왕후

길윤형 기자 2024. 8. 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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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12
하나로 똘똘 뭉친 조선과 일본이 싸우지 않고, 조선의 개혁세력과 일본이 한 편이 되어 고종과 대립하게 됐다는 이 불행한 사실이야 말로 이후 벌어지게 되는 잔인무도하고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조선 개혁을 지도한다는 중대한 임무를 띄고 1894년 10월 주조선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는 갑오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선 대원군과 명성왕후라는 두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첫 목표였던 대원군은 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은퇴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고종과 한몸인 명성왕후는 어쩌지 못했다. 이는 이후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제공

일본과 조선의 개혁 세력이 1894년 7월23일 대원군을 전면에 내세운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20년 간 조선을 좌지우지했던 민씨 척족 정권이 무너졌다. 나흘 뒤 갑오개혁을 본격 추진해 가기 위한 특별기구인 ‘군국기무처’가 만들어졌다. 이 기구엔 김홍집(총재)·김윤식·박정양·어윤중 등 중신들과 ‘일본당’이라 불리던 김가진·김학우·조희연·안경수·유길준 등 젊은 관료들이 대거 참여했다. 조선왕조실록 6월28일(양력 7월30일)치를 통해 이날 군국기무처에 △국내외 공·사문서에 개국기년 사용 △청과 조약 개정 △문벌·계급·신분제 타파 △연좌제 금지 등에 대한 의안이 올라왔고, 고종이 이를 “모두 윤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군국기무처는 활동이 끝나는 12월 말까지 40차례 회의를 통해 약 210건의 개혁 의안을 심의·통과시켰다.

갑오개혁에 나선 조선이 해결해야 했던 ‘핵심 과제’는 전통적인 ‘군주권’을 근대 국가의 틀 속에 적절하게 자리매김하는 ‘권력의 제도화’였다. 주조선 일본공사관의 ‘넘버2’였던 스기무라 후카시 1등 서기관은 1895년 7월13일 외무성에 보낸 전문에서 “조선의 옛 관습은 본시 무한한 군주전제여서 왕실 외에 거의 정부가 없고 모든 일이 친재(親裁)에서 나왔다. 근래 특히 군주전제가 극심해 작은 관리의 진퇴와 작은 액수의 출납에 이르기까지 군주가 이를 친히 결제했다”고 적었다. 구한말 조선이 망국의 위기에 빠지게 된 것은 고종과 명성왕후가 절제 없이 행사하던 군주권 때문이었다. 특히 국가 운명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재정·인사·군사에 대한 주요 결정은 왕 한 사람의 ‘독단’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갑오개혁의 ‘브레인’ 유길준은 “국가와 왕실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왕이 곧 국가는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조선이 망국이 위기에 빠진 이유는 고종과 명성왕후가 군주권을 남용했기 때문이라는 게 당대인들의 공통된 평가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 모두 참여했던 박영효(1861~1939)도 1930년 1월4일치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당시 고종께선 별로 정사를 돌보지 않으셨소. (그러니) 민비는 궁중·부중(정부) 할 것 없이 정실에 말미암은 정사를 독점하려 상감을 농락하였다”고 말했다.

일본에도 ’핵심 과제’가 있었다. 갑오개혁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돈과 피를 쏟아부어 전쟁을 시작한 이상 그에 걸맞은 성과를 얻어야 했다. 목표가 정해진 것은 8월17일이었다.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은 이날 각의에서 향후 대조선 정책과 관련해 “‘명의상’(名義上) 독립국임을 공인하고 (중략) 제국(일본)이 영원히 또는 장기간(永遠若クハ長期間) 그 독립을 보호·부조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끌어낸다. 조선을 일본의 반영구적인 ‘보호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제국주의 시기였던 19세기 말 기준으로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면, 한반도의 전신(눈과 귀)·철도(팔과 다리)를 손아귀에 넣고 이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군대를 배치해야 했다. 이렇게만 하면, 조선을 직접 통치하려다 러시아 등 제3국의 간섭을 부르는 일 없이, 한반도를 사실상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일본은 이를 위해 20일 한반도의 철도·전신에 관한 권리를 자신들이 확보한다는 내용의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다. 조선의 개혁 정권은 이 문서에서 내정 개혁을 하라는 일본의 “권고를 힘써 시행”하기로 약속했다.

조선과 일본은 청일전쟁이 시작된 직후인 1894년 8월20일 ‘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다. 이를 보면, “일본 정부는 조선 정부가 내치를 바로잡을 것을 절실히 바랐고, 조선 정부 또한 그것이 진실로 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권고에 따라 힘써 시행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약속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조선의 개혁세력과 일본이 ‘공동 운명체’로 묶여지게 된다. 이 조약엔 또 일본의 힘을 빌어 경부선·경인선 철도 등을 설치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서울대 규장각 제공

이 조약은 구한말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선독립’(김홍집 등 갑오개혁 주도세력)과 ’조선의 보호국화’(일본)라는 양립할 수 없는 전략적 목표를 가진 두 집단이 공동 운명체로 엮이는 ’모순’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두 세력과 갈등하게 된 이들은 자신의 전제 군주권을 지키려 개혁에 저항하는 고종과 명성왕후였다. 하나로 똘똘 뭉친 조선과 일본이 싸우지 않고, 조선의 개혁세력과 일본이 한 편이 되어 고종과 대립하게 됐다는 이 불행한 사실이야 말로 이후 벌어지게 되는 잔인무도하고 피비린내 나는 비극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하지만 본격적 개혁에 앞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평양에 도사리고 있던 청의 존재였다. 노즈 미치쓰라 중장이 이끄는 5사단(혼성9여단·10여단)과 원산을 통해 상륙한 3사단 일부 병력으로 구성된 일본군(약 1만6500명)이 예즈차오(섭지초)가 이끄는 청군(약 1만5000명)이 버티고 선 평양성을 향해 총공격을 시작했다. 9월15일 새벽이었다. 열 시간 남짓 만에 싱겁게 끝난 이 전투로 삼전도의 굴욕(1637) 이후 3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조·청 간의 사대관계가 사실상 해체됐다.

청일전쟁의 최대 승부처였던 평양전투가 벌어진 것은 1894년 9월15일이었다. 노즈 미치쓰라 중장이 이끄는 5사단(혼성9여단·10여단)과 원산을 통해 상륙한 3사단 일부 병력으로 구성된 일본군(약 1만6500명)이 예즈차오(섭지초)가 이끄는 청군(약 1만5000명)이 버티고 선 평양성을 향해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 전투의 승부를 가른 것은 두 나라 군대의 ‘사기’ 차이였다. 열시간 남짓 전투 과정에서 ‘주전론’을 외치던 장수 줘바오구이(좌보귀)가 전사하자, 청은 곧바로 백기를 들었다. 불과 한나절 만에 끝난 이 전투의 결과로 삼전도의 굴욕(1637) 이후 3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조·청 간의 사대관계가 사실상 해체됐다. 국립공문서관 아시아역사센터 제공

청일전쟁의 승부가 가려지자, 일본은 개혁의 고삐를 바싹 당기기로 결심한다. 투입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 2차 내각의 내무대신이자 메이지 유신의 원훈 가운데 하나인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였다. 10월15일 조선 공사로 정식 임명된 이노우에는 10월26일 서울에 입성했다. 이노우에는 두 개의 방해물로 ‘왕비’(명성왕후)와 ‘대원군’을 지목한다. 먼저 제거된 것은 쿠데타의 '얼굴마담'이었던 대원군이었다. 일본은 평양전투 과정에서 대원군이 청과 내통했음을 보여주는 ‘밀서’를 손에 넣게 된다. 이노우에가 이 서한을 내보이자, 대원군은 견디지 못하고 11월18일 은퇴를 선언한다.

이노우에는 그 직후인 20~21일 김홍집(총리대신)·김윤식(외무대신)·어윤중(탁지대신) 등 모든 대신이 참석한 가운데 경복궁 함화당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이 자리에서 △정권(권력)은 모두 한곳에서 나와야 한다 △대군주는 정무를 직접 결재할 권한이 있고 법령을 지킬 의무가 있다 △왕실 사무를 국정과 분리한다 △왕실 조직을 정비한다 △의정부와 각 아문(부서)의 직무·권한을 정한다 △조세는 탁지아문에서 일률 관리하고 조세는 일정 비율로 정한 것 외에 어떤 명목·방법으로도 징수하지 않는다 등으로 구성된 ‘20개의 개혁조항’에 고종의 동의를 얻었다. 전제왕권을 제한해 ‘입헌군주제’로 가는 문을 열고, 왕실의 무분별한 정치간섭을 막으며, 과도한 세금 징수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반응은 ‘일본외교문서’ 제27권 제2책 91~107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혁을 요구하는 이노우에의 말을 장지문(여닫이문) 뒤에서 듣고 있던 명성왕후가 고종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러자 고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6월21일(양력 7월23일·경복궁을 점거한 쿠데타 발생일) 이후 짐은 거의 국무상 하나의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고, 국정의 모든 일이 각 대신이 관장하는 바가 되니 이 같은 일로 인해 군권이 오손(汚損)된 것이 없겠는가. 또 오늘날 정령의 대부분이 궁문(宮門) 밖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이것이 누구의 죄가 되겠는가. 돌아보건대 나의 신료들이 짐에게 불충한 것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노우에는 나흘 뒤인 24일 무쓰에게 보낸 전문에서 고종 부부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관청의 직무 권한과 군주권 등에 대한 사항을 설명해도 그 문제의 뜻조차 이해하지 못하여 군주권이라고 하면 마음대로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여탈하는 권리라고만 이해한다. 권력은 마땅히 제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곧 국회를 개설해 일을 결정하고 백성의 승낙을 요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등 그 어리석음이 실로 뜻밖이었다.”

이노우에는 12월8일 ‘개혁의 걸림돌’임이 분명해진 고종 부부와 다시 만난 뒤 그 결과를 10일 영문 전문에 담아 무쓰에게 보고했다. “Queen assured me that she would never interfere in politics hereafter and the king appeared to made up his mind for our reforms”(명성왕후가 다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약속했다. 또 왕은 우리 개혁을 시행하기로 마음을 먹을 것 같았다) 이 약속을 받아낸 이노우에는 17일 임시기구였던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김홍집(총리)과 옛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내무대신)를 주축으로 하는 새 개혁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들의 작업 결과 1895년 4월19일 내각관제가 발표됐다. 이를 통해 △법률·칙령안 △세입·세출의 예산·결산 △내외 국채(國債) 관한 사항 △국제 조약과 중요한 국제 문제 등의 주요 문제는 내각 회의를 거쳐 결정한 뒤 고종의 최종 재가를 받게 됐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이 변화를 “정권을 완전히 내각에 빼앗겨 왕실이 고립”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본의 강력한 위세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 온다. 러시아·독일·프랑스 세 나라 공사가 4월23일 승전국 일본에 “랴오둥 반도 획득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3국간섭)이었다. 일본은 5월5일 이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이 ‘힘의 변화'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그동안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의 ‘힘의 우위’ 때문이었다. 그것이 흔들리자 개혁에 위기가 찾아 온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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