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고 외로운 처지 보듬고 뼛속까지 토속적인 사람

한겨레 2024. 8. 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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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윤중호 시인 20주기를 추모하며

고 윤중호 시인. ‘윤중호를 사랑하는 모임’ 제공

31일 충북 영동문학관 추모행사

나는 대학 재학 중에 그(윤중호 시인·1956~2004년 9월3일)를 만났다. 2학년 새 학기에 복학생들이 들어왔다. 그들로부터 전설로 떠도는 영문과 소속의 한 선배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과연 소문대로 괴짜였다. 퉁방울눈에, 뭔가 못마땅한 일에 인상을 구길 때마다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 굵은 눈썹에, 부치다 만 빈대떡마냥 너부데데한 얼굴에 주먹코를 가진, 영락없이 두꺼비 상인 강렬하나 구성진 구석이 있는 인상의 선배도 나처럼 어지간히 학과 공부에는 흥미가 없는 듯했다. 그는 인도 신비주의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유별난 그의 지적 취향이 못마땅했으나 그는 묘한 인간적 매력으로 그를 따르는 팬덤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말술이었고, 타령조를 즐겨 불렀고, 입성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거나 걸치고 다녔다. 누구의 구애도 받지 않는 낭만적 노마드였다. 술자리에서 걸쭉한 입담으로 좌중을 압도하였다.

그는 졸업 후 서울로 상경하여 잡지사 기자가 되어 산다 하였다. 한동안 그의 안부를 전해 듣지 못했다. 나는 재학 중에 교육 무크지 ‘민중교육’에 쓴 글이 말썽이 되어 졸업 후 취직(교사)을 하지 못하고 실업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느 날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남 방배동에 위치한 도서출판 어문각 편집부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올라오라는 거였다.

서울 흑석동 꼭대기 판잣집에 방 한 칸을 빌려 그와 함께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매일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왔다. 월급을 받는 족족 술을 마셔댔다. 그달에 받은 봉급은 보름도 가기 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면 그는 미리 가불을 해서 쓰곤 하였다. 오지랖이 넓어 주변에 돈 없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니 돈을 모을 턱이 없었다.

어려운 형편에 늘 주변 챙겨
동사할까 노숙인 돕다 낭패도
이른 죽음에 알 수 없는 부아가
시집 네 권과 동화책 세 권 남겨
시가 고향 벗어난 적 없었고
입말 즐겨 쓴 뛰어난 문장가
고달픈 현실 다루면서 해학도

흑석동에서 살다가 아래 본동으로 전세방을 구해 놓고 이사를 가기로 했다. 주인의 양해를 구해 이삿짐부터 부려놓고 모자란 돈을 구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갔다. 간신히 마련한 돈을 가지고 올라오니 그가 낙망한 얼굴로 불도 들이지 않은 냉방에서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차저차 전후 사정을 듣고 나는 참으로 어이가 없어 그만 실소하였다. 그가 꺼낸 얘기는 대강 이러하였다. 전날도 여느 날처럼 일을 마치고 술을 꼭지까지 오르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 앞 길가에 한 부랑자가 쓰러져 있었다. 영하의 강추위에 그대로 두면 동사할까 저어되어 잠든 그를 깨어 방으로 들인 뒤 요기를 하게 한 다음 재웠다. 다음날은 마침 휴일이어서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 보니 그는 온데간데없고 책장에 꽂힌 책들이 죄다 방바닥에 쏟아져 나와 있더라는 것이었다. 순간 짚이는 데가 있어 책들 사이에 숨겨 놓은 돈을 찾으니 감쪽같이 없어졌다.

다음날 그는 잃어버린 돈을 벌충하러 직장에 며칠 휴가를 내고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내려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일여삼추라 했던가. 나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보름 만에 그는 빈손으로 나타났다. 어찌 된 일이냐 물으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행상하는 어머니에게 어렵사리 돈을 구하긴 했는데 오는 도중에 이 친구 저 친구들을 만나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그새 수중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어 방을 비우고 나와야 했다. 그렇게, 그와 나는 헤어지게 되었다.

그와 나는 서울의 한 지붕 아래 살면서 나날의 연명에만도 힘에 부쳐 간간이 누군가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 직접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렇게 밀림의 통로처럼 각자의 다른 길을 걷다가 20년 전 그의 부음을 불쑥 듣게 되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것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황망감과 함께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달려가니 선배에게 술 깨나 얻어 마신 얼굴들이 여럿 보였다.

고 윤중호 시인. 양문규 시인 제공

돌아보면 그는 뼛속까지 토속적인 사람이었다. 음식도 노래도 글도 그러하였다. 그가 찾는 단골집은 일부러 힘들여 찾아야 겨우 알 수 있는 뒷골목 후미진 옴팡 집이었다. 주종은 소주 아니면 막걸리였고, 안주거리도 주로 돼지 불고기나 오징어, 주꾸미, 꼴뚜기 등속의 어물을 구워 먹었다.

그는 생전에 네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 그리고 세 권의 동화책을 남겼다. 그는 그가 산만큼 쓰고 죽었다. 과하지 않고 덜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정직하였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였다. 입말을 즐겨 쓰는 그의 문장은 구수하면서도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막힘없이 활달하고 유연하였는데, 고달픈 현실을 다루면서도 능청과 해학과 골계가 들어 있었다. 그의 시는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일관되게 낮고 외로운 처지들을 자기 품으로 끌어안았다. 그는 출세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기질의 사람이었다. 난 체하는 이들을 극도로 경원시하였고, 위선이나 허례도 벌레 보듯 하였다. 눈사람처럼 표리가 동일한 사람이었다. 8월31일 ‘영동문학관’에서는 그의 사후 20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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