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재사용땐 허가 또 받아야···'겹겹 규제'에 기술 지체 우려 [리빌딩 파이낸스]
해외사 IT서비스 개발 활발한데
국내에선 데이터활용 제한적 허용
비식별화 작업 등 절차 까다로워
"데이터사업 투자해도 절반만 성과
불확실성 큰데 누가 뛰어들겠나" 중>
국내 A 보험사는 최근 신규 서비스 개발 일정을 다시 세우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 회사가 보유한 금융 데이터를 서비스 구축에 활용하기 위해 비식별화 조치를 거친 후 관계기관에 허가서를 냈지만 반려됐기 때문이다. 해당 보험사의 한 관계자는 “비식별화 등 데이터 전처리가 적합한지 건건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면서 “허가를 받더라도 데이터 분석은 담당 기관을 직접 방문해야 가능한 만큼 기업이나 금융사들이 줄을 서서 대기해 예약을 잡는 일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험 업계 관계자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데이터처리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활용 절차가 까다로워 실제 데이터 사용까지 통상 최소 수개월이 걸린다고 전했다.
디지털 전환을 통해 금융 혁신을 이루기 위한 국내 금융권의 시도는 이처럼 시작부터 핸디캡을 안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원유이자 쌀인 데이터 활용이 규제의 문턱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A사의 사례처럼 금융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허가 등 사전 절차에만 상당한 시간을 써야 한다. 데이터 분석으로 ‘맞춤형 서비스’를 속속 선보이며 금융사를 넘어 테크 기업으로 변신하고 있는 해외 금융사와 크게 비교되는 점이다. 국내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 금융 산업이 글로벌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기술 지체’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현행법상 금융사의 데이터 활용은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예컨대 고객별 은행과 증권투자 거래 내역을 활용해 맞춤형 금융 상품을 개발할 목적으로 데이터를 결합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정한 제3의 데이터 전문기관을 통해 각 데이터를 전송받아야 한다. 활용 후에는 즉시 파기해야 하며 전에 활용한 적이 있는 동일한 데이터라도 재결합을 위해서는 신청부터 다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금융 데이터를 가명 처리하거나 범주화해 데이터가 누구로부터 발생했는지 특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비식별화 작업도 마찬가지다. 개인정보 처리자가 기초 자료를 작성하면 3명 이상의 개인정보보호책임자로 구성된 ‘비식별 조치 적정성 평가단’은 개인 식별 가능성에 대한 평가를 진행한다. 평가 결과가 부적정인 경우 비식별 조치를 추가 실시하고 재평가를 요청해야 한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비식별화 과정 중 데이터 유실이 발생해 막상 활용 가치가 떨어지는 경우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금융지주사의 경우 금융지주회사법에 따라 내부 경영관리 목적에 한해 고객 동의 없는 계열사 간 정보 제공을 허용하고 영업 및 마케팅 목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또 포괄 동의가 가능한 신용정보법과 달리 금융실명법은 금융거래 정보를 제공할 때마다 별도의 동의가 필요하다.
국내와 달리 해외 금융사는 마케팅, 리스크 관리, 신용평가, 업무 효율화 등 각종 분야에서 데이터 분석을 토대로 정보기술(IT) 서비스 업체처럼 변신하고 있다. 캐나다왕립은행(RBC)은 금융소비자의 과거 데이터에 기반해 다가올 7일간 예상되는 금융 지출을 안내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객은 인지하지 못했던 불필요한 소비지출을 줄이면서 새로운 금융 상품을 가입하는 등 고객 참여가 활발해진 것으로 나타났다. RBC는 비정기적인 소비에서 규칙을 찾아 예측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네덜란드 ABN암로은행은 넷플릭스·유튜브 등 고객이 이용하고 있는 구독 서비스를 정리해 한눈에 보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월별·분기별 평균, 결제 예정 금액을 알려주고 불필요한 서비스는 은행 앱에서 해지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2021년에는 사망한 가족이 가입한 금융 상품, 정기 서비스 등 금융 정보를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일명 ‘데스 테크(death tech)’ 서비스를 출시하기도 했다.
미국의 생명보험사 메트라이프는 빅데이터 기술을 기반으로 약 70개의 데이터베이스에 흩어져 있던 1억 명 이상의 고객 데이터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해 고객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상품 판매 및 마케팅, 고객 관리 등에 활용해오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사가 데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전환 관련 사업을 할 때 투자를 하면 어느 정도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과감하게 투자를 할 수 있다”면서 “현재 금융권은 100을 투입하면 규제 등의 이유로 절반 수준의 결과물밖에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어 데이터를 활용한 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박지수 기자 syj@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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