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티메프 사태’ 막을 수 있나…‘10조 상조회사’ ‘10조 e-쿠폰’ 도마에
(시사저널=정윤성 기자)
티몬·위메프(티메프) 정산 지연 사태를 계기로 '그림자 금융'의 사각지대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정산 지연 사태를 키운 원인으로 현금성 상품권이 지목되면서다. 티몬과 위메프가 판매자에게 줘야 할 정산금을 기업 필요에 따라 마음대로 쓰고 추후에 판매한 상품권 대금으로 '돌려막기' 함으로써 피해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나중에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으로 고객에게 돈을 먼저 받고, 선수금을 회사 필요에 의해 다른 목적으로 굴리는 것은 사실상 회사가 유사 금융업을 영위하는 것과 다름없다. 문제는 디지털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그 규모 또한 급속도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시스템이 유지된다면 언제든 '제2의 티메프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관련 규제를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상품권으로 유동성 확보한 '티메프' 연쇄 효과
상품권이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티몬과 위메프가 상품권을 '단기 자금 조달 수단'으로 썼기 때문이다. 티몬과 위메프는 다른 이커머스 플랫폼과 달리 소비자로부터 받은 돈을 길게는 60일까지 가지고 있다가 판매자에게 정산했다. 사실상 소비자로부터 두 달 짜리 무이자 대출을 받은 것과 같은 효과를 누렸다. 이렇게 확보한 현금을 여러 용도로 활용하며 사업을 지속한 것이다.
티몬과 위메프의 모기업인 큐텐이 이 돈을 다른 곳에 유용하면서 판매자에게 돌려줄 현금이 점점 부족해졌다. 티몬과 위메프는 상품권과 선불충전금을 액면가보다 싼 가격에 대량 판매해 유동성을 확보하고 정산금을 돌려막기 시작했다. '선주문 후사용' 방식의 '티몬 캐시'를 10% 할인 판매했다. 해피머니상품권 5만원권을 4만6250원에, 컬쳐랜드상품권 5만원권을 4만6400원에 각각 판매했다. 합리적 소비를 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상테크(상품권+재테크)'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상품권 판매를 기업어음(CP) 발행처럼 쓰이고, 판매 대금 정산을 위해 시간을 버는 수단으로 악용했다는 지적이다.
티몬과 위메프가 상품권을 판매한 대금을 발행사에 지급하지 못하자, 발행사도 가맹점에 정산을 하지 못할 위기를 마주했다. 이를 우려한 가맹점들이 상품권 사용을 중단하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이어졌다.
이 과정에 정부의 개입은 없었다. 관련 규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품권 관련 규제는 25년째 그대로였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된 이후 아직 관련 법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상거래 행위가 급격히 변했음에도 법은 그 변화를 담지 못했다.
상품권은 현행법상 인지세만 내면 누구나 제한 없이 발행할 수 있다. 해피머니의 발행사 해피머니아이엔씨가 수년째 완전 자본 잠식 상태에 빠져 있는 데도 상품권을 찍어내 티몬에 공급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지난 5월부터 7월까지 시중에 풀린 해피머니 상품권은 3000억원 규모로 추정된다. 상품권 교환 업체들은 10억~30억원, 개인들은 많게는 수천만원의 상품권을 보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막대한 소비자 돈을 운용하지만 관리·감독 체계가 없는 탓에 금융당국에 선불업체로 등록돼 있지 않고 보증보험도 없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해피머니 상품권의 경우 금융위에 등록된 업체가 아니기 때문에 당국에서 관리 감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한 법 개정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상품권을 발행하려는 자가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춰 금융위원회에 신고하고, 필요할 때 금융위가 자본금 등 기준에 따라 연간 발행 한도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도 결국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제2의 티메프 도처에…뒤늦게 제도 개선 나서
티메프 사태가 발발한 이후 정부는 칼을 빼들었다. 6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최근 열린 '위메프·티몬 판매 대금 미정산 관련 관계부처 TF 회의'에서 문제가 드러난 상품권 운용과 관련해 제도 개선을 추진키로 했다. 다음달부터 상품권 발행 업체에 대해 선불충전금을 별도로 관리하도록 규정하는 전자금융거래법(전금법) 개정안도 시행된다.
정부 대책에도 여전히 허점이 많다. 개정안에 따르면, 발행 잔액 30억원·연간 총발행액 500억원이 넘는 기업만 규제 대상이다. 상품권 발행 주체와 발행 한도 규제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소비자의 돈을 예치 가능하도록 열어뒀다는 점도 문제로 지목된다. 당기 말까지만 해당 금액을 맞춰두면 되기 때문에 '단기 자금 조달 수단'으로의 활용은 여전히 가능한 구조다.
당국의 관리·감독이 지지부진한 사이 경고음은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해피머니뿐만 아니라 티몬과 위메프에서 상품권을 판매한 모바일 쿠폰 업계도 1000억원 안팎의 정산 지연을 겪고 있다. 실제 통계청에 따르면, 'e-쿠폰서비스 거래액'(전자상품권 거래규모)는 지난해 10조649억원으로 집계됐다. 4조4952억원 수준이던 2020년에 비해 두 배가 됐다. 올해만 지난 5월까지 4조5793억원의 거래액을 보이면서 시장 성장세는 여전히 가파르다. 언제든 해당 쿠폰을 구매한 고객은 해피머니처럼 사용과 환불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불안을 떠안아야 하는 구조다.
누구나 상품권을 발행할 수 있다는 점도 이미 문제로 지목된 바 있다. 기업들이 무차별적으로 상품권을 발행하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탓에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 2022년 한 호텔은 유효 기한이 1년인 15만원 상당의 뷔페 상품권을 이커머스 플랫폼에서 판매했다. 구매자들의 사용이 주말 등으로 몰리면서 예약 경쟁이 치열해졌다. 유효 기간 전에 상품권을 사용하지 못하면 환불도 불가능한 탓에 고객들의 우려가 커지기도 했다. 또 다른 호텔에서도 숙박권을 팔았다가 예약이 불가능하다는 항의가 이어지쟈 부랴부랴 이용기간을 연장해주기도 했다. 언제든 공수표가 될 수 있다는 위험을 알리는 신호다.
상품권뿐만 아냐…거대해지는 그림자 금융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그림자 금융'이 있고, 그 규모 또한 점점 커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스타벅스는 선불충전금 규모는 3000억원에 달한다. 어지간한 지방 저축은행의 예치금과 맞먹는 규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의 규제 대상이 아니다. 모든 매장이 직영점으로 운영하고, 포인트 사용처가 직영점으로 제한된 곳은 선불업자 등록이 면제되기 때문이다. 스타벅스는 선불충전금에 대해 지급보증보험을 가입해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고객에게 돈을 미리 받아 나중에 서비스를 이용하는 구조의 상조회사 역시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선수금 규모가 10조원에 육박하지만 여전히 그 자금 운용에 대한 규제에는 공백이 많다. 상조회사는 선불식 할부거래업자로 공정거래위원회 관리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선수금의 50%를 은행에 예치하고 있다. 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절반에 대한 규제는 없다. 금융당국의 관리 감독도 받지 않는 데다 공시 의무도 없어 고객의 돈이 투명하게 관리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전문가들은 소비자 돈을 운용하는 사업에 대해 명확한 관리 기준과 방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제2의 티메프 사태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예를 들어 이커머스의 경우 소비자 분쟁 가능성 때문에 잠시 소비자 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판매대금을 60일이나 정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이런 유보 기한에 대한 합리적인 기준이 마련되지 않으면 소비자 돈이 유용되는 그림자 금융의 사각지대는 계속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관련 산업의 발전보다 소비자 보호를 위한 장치가 마련되는 것이 우선이다"며 "이런 비즈니스 구조를 가진 사업들이 전금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도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서 소비자의 돈과 서비스를 안전하게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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