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행복' '공정'…올림픽이 일깨워준 것들
(서울=연합뉴스) 황재훈 논설위원 = 파리올림픽에서의 한국 선수단 선전이 놀랍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가장 작은 규모의 선수단이지만 팀코리아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다. 지금까지 여러 종목에서 금맥을 캐냈지만, 지난 주말 밤 열린 독일과의 유도 혼성단체전 동메달 결정전은 가장 기억에 남는 명승부 중 하나다.
단체전 6개 체급 가운데 남자 73㎏급과 여자 70㎏급 출전 선수가 없는 한국은 처음부터 체급 공백과 싸워야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투혼을 보여줬다. 스코어 3-3 동점 속 골든스코어 경기로 갈라진 승부에서 추첨으로 출전하게 된 대표팀 '맏형' 안바울은 체격과 체력 열세에도 극적 승리를 거뒀다. 이 경기가 뇌리에 더 각인된 것은 승부가 갈린 뒤 모습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100㎏ 넘는 선수들까지 어린아이보다 더 해맑은 웃음으로 경기장을 누비며 기뻐했다. 이 세상 누구보다, 그 어느 순간보다도 더 행복하고 순수한 맑은 웃음을 목격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금메달 딴 선수 못지않게, 아니 때때론 그보다 더 기쁜 표정으로 동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환호하는 경우를 본다. 은메달을 딴 선수보다 동메달을 목에 건 선수의 웃음이 더 밝아 보인 경우도 많다. 미국 심리학자 빅토리아 메드벡(Medvec) 연구팀의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연구팀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메달 확정 때와 시상식 표정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 동메달 수상자들이 은메달 수상자들보다 훨씬 행복한 표정을 지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뻐하는 정도에 따라 1∼10점 사이로 선수들의 표정에 점수를 매긴 결과 은메달을 딴 선수의 표정 점수는 4.8점, 동메달 선수들은 7.1점으로 분석됐다.
은메달을 딴 선수는 '금메달을 딸 수 있었을 텐데…'와 같은 아쉽다는 식의 사고를 많이 하지만, 동메달 선수들은 노메달에 그친 4위 이하 선수와 비교하며 흡족해하는 것이 주된 요인으로 설명됐다. 상대적 행복감은 은메달보다 동메달을 땄을 때 더욱 크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인 셈이다. 자신을 누구와 비교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대조효과'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와 관련, 기쁨은 절대적인 성적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비교하느냐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설명이 있다. 결국 누구와 비교하느냐, 어떤 방향에서 비교하느냐에 따라 느끼는 행복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돈을 벌었지만 기대보다 더 적었다면 오히려 실망하고, 돈을 잃었지만, 두려워했던 것보다 적게 잃었을 때 상대적인 안도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비슷하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선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 5개를 싹쓸이한 한국 양궁 대표팀의 대업도 빛났다. 한국 여자 양궁은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36년간 올림픽 단체전에서 10회 연속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기록하기도 했다. 새로운 역사를 쓴 양궁대표팀의 눈부신 기록은 공정한 선발, 과학적 훈련, 기업의 지원 삼박자가 어우러져 나온 결과라는 평가가 많다. 이 중 눈길이 가는 것은 '공정'과 '투명'이다. 학연·지연 등 파벌은 물론 과거의 수상 경력 등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오로지 실력으로만 경쟁해 대표팀을 선발한 것이 첫 번째 원동력으로 꼽힌다.
우리 국민 3명 중 2명은 한국 사회가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 공개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Ⅹ)-공정성과 갈등 인식'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19∼75세 남녀 3천950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우리 사회는 공정한 편'이라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34.9%에 그쳤고, 나머지 65.1%는 동의하지 않았다. 한국 양궁대표팀은 '공정'이 어떤 모습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공정한 사회가 될 때 어떤 결과를 만들 수 있는지도 증명해줬다.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인 58.2%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결혼을 할 수 없다고 답했다. 대화와 소통이 단절되고, 서로 혐오하고 증오하는 한국의 현실 정치가 파생시킨 극단적 갈등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정치 성향이 다르면 친구·지인과의 술자리를 할 수 없다고 답한 사람도 33.0%에 달했다. 이런 갈등을 더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의 건강한 지속성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동메달을 따고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인간이란 결국 마음먹기에 따라 주관적인 행복감, 가치 매김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안을 관조하고 인식하는 태도를 조금만 유연하게 가진다면 한국 사회의 깊어진 갈등도 한결 잘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역지사지로, 동일 사안을 이쪽저쪽에서 두루 바라본다면 서로에 대한 평가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j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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