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만한 '역'이 10여개나…'철도 수도' 런던의 기차역을 가다

전현우 서울시립대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원 2024. 8. 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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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철도 기행] ② 런던 12개 터미널역 탐방기(上)

거대도시, 이른바 '메가시티'의 특징은 무엇일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높은 마천루,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 역사적 사건의 현장들, 과거와 오늘의 기술적, 문화적 성취가 극히 좁은 구역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양극화된 삶의 조건, 낡았지만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제대로 고치지 못하고 있는 후줄근한 건물들, 좁은 토지와 끔찍한 정체, 에어컨의 열기와 매캐한 먼지가 자리를 지킨다. 철도는 이 모든 것을 잇는다. 철도, 철도가 없다면 거대 도시는 현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산업 혁명이 일어난 런던은 철도의 도시다. 나는 몇 년 전 첫 책 <거대도시 서울 철도>에서 전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거대 도시(2018년 기준 43개)의 철도망 규모를 분야별로 측정했던 적이 있다. 런던의 철도망은 양적으로 압도적이었다. 서울과 비슷한 면적을 둘러싼 순환 도로(north&south circular road)를 통과하는 철도의 물량은 서울의 3배였다(52복선).

비슷한 규모의 다른 거대도시와도 달리, 런던은 영국 전국과 런던 근교로 향하는 열차가 시종착하는 터미널 역이 아주 많았다. 이들 역의 승강장을 합치면 약 150개였고, 시종착 열차가 드나드는 복선의 수는 거의 40개 복선이었다. 쉽게 말해 서울역의 10배 규모다. 용산, 청량리, 수서를 합쳐도 5배는 된다. 이들은 여러 중심지의 곳곳에 분포해 있기도 했다. 서울역만한 역들이 도심을 둘러싸고 10여개나 자리잡고 있었다. 적어도 도심에서는 모든 방향으로 철길을 타고 나가는 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세계의 다른 도시에도 이 정도의 규모는 사실 없었다. 최소한 터미널 역의 규모에서는 런던은 세계 최대였다.

필자는 지난 6월 말 동료들과 유럽을 방문했다. 긴 출장길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주말, 런던에서 꼭 보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는 이야기를 나누다, 이 모든 터미널역을 방문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도심을 빙 두르고 있는 이들 역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 모두 답파해보기로 했다.

어디를 답사할 것인가?

▲그림 1 런던 도심부와 철도망 구조도. 자료: openrailwaymap.org 누락된 Mooregate는 12번 역 근처에 있고, Blackfairs는 9번과 평행하게 템즈 강 위에 있다.

이들 역의 목록과 규모는 다음과 같다. (번호가 꼬인 것은 답사 순서 때문이다)

(답사하지 못한 터미널 역은 두 개인데, 이들에 비해서는 규모가 현격히 작다. Mooregate는 지하에 2홈만 있고, Blackfairs는 교량 위에 템즈강 횡단철도(Thameslinks)용 2홈과 터미널 2홈만 있다.)

이들 역 근처에 런던의 모든 것이 있다. 중세부터 템즈 강 수운의 거점이었던 런던 교, 도심부인 시티를 둘러싸고 있는 다수의 역들, 나폴레옹 군을 격파한 승리에 대한 기념물, 산업혁명의 시발지 리버풀∙맨체스터로 가는 길, 런던 근교의 수많은 위성 도시들로 향하는 길, 해리포터와 친구들이 열차를 타고 내리던 곳, 그리고 해저터널을 돌파하여 프랑스와 베네룩스로 가는 유로스타까지. 중세부터 2024년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의 핵심 무대이자 사람들의 상상이 집약된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철길이 잇고 있는 현장이었다.

킹스 크로스 역(1), 세인트판크라스 역(2), 유스턴 역(3)은 모두 한 군데 몰려 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이들 역으로 통근 열차를 타고 진입했다. 사실 말이 통근 열차이지, 한국철도로 치면 ITX-청춘에 준하는 차내 시설을 갖춘 열차들이었다. 크로스 시트, 즉 열차 진행 방향(또는 그 반대)를 바라보는 좌석을 배치해 놓아, 좌석 수가 극대화되어 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광역 철도라도 대규모 승객을 일단 실어나르기 위해 롱 시트, 즉 열차 진행방향의 직각 방향을 바라보는 좌석의 열차가 서울부터 천안과 아산까지 운행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어도 광역철도는 동아시아보다는 높은 서비스 수준을 상정하고 열차를 운행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좌석마다 테이블도 있었다. 가끔 무궁화호에서 작업을 해야 할 때, 테이블이 없다는 게 아쉬웠던 기억이 함께 났다. 이 좌석은 이 날 여러 차례 우리의 쉼터가 되었다.

킹스크로스 역

해리포터가 열차를 탔다는 킹스 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 옆에 내렸다. 9와 3/4 승강장 옆에 장사진을 친 관광객 옆을 지나, 영국 동북부로 가는 동해안 본선(East coast main line) 열차를 살펴보러 움직였다. 브리튼 섬으로 건너온 로마군과 켈트족 여장군 보우디카 사이의 마지막 결전이 바로 이 역 부지에서 일어났고, 그의 무덤이 우리가 내린 9, 10번 홈에 있었다는 전승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우디카의 유령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다) 현대사에도 이 역은 폭력 사태가 벌어진 곳이었다. 2차대전때는 독일 공군의 항공폭탄이 떨어지고, 아일랜드 공화국 임시파(IRA)의 폭탄 테러도 이 역에서 있었다. 공학적으로도 리젠츠 운하(Regent’s Canal) 밑으로 본선을 통과시키는 곡예가 벌어져 있었고, 2021년에는 코로나19를 맞아 열차 운행이 줄어든 틈을 타 해묵은 숙제였던 배선 개선 공사도 (그림2) 벌어졌다. 2백년 묵은 배배꼬인 배선을 바로잡는 난공사였다고 한다. 네트워크레일이 관리하는 이 배선 위로, 다수의 민자 열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그림 2 킹스크로스 역의 배선 개선 공사 모식도. 출처: https://www.newcivilengineer.com/the-future-of/future-of-rail-uncrossing-track-the-kings-cross-crossovers-29-06-2021/

세인트 판크라스 역

광장으로 나서니 웅장한 궁전 같은 건물이 우리 일행의 눈에 들어왔다. 1869년에 건설된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역사로 건설된 르네상스 호텔이었다. 옛 서울역을 넘어, 옛 도쿄역보다도 큰 이 건물은 고딕 성당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했다. 인도 뭄바이의 차크라바티 시바지(영령 인도 시절에는 빅토리아 역) 역사 정도나 이런 위용을 간직하고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커다란 역을 건설해야 했던 것은 이 역이 후발 민자사업자(Midland Railway, MR)의 착발역으로 건설된 덕분이다. 런던에서 북쪽으로 가는 양대 철도(동해안 본선, 서해안 본선) 사이의 중부 지역을 노린 이 회사가 경쟁력을 갖추려면 뭔가 눈에 띄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역 내부 로비로 들어서니 유로스타 열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길에서 바로 승강장까지 연결된 두단식 역사의 개방감은 언제 보아도 감탄스럽다. (다만 이 역은 국제역이라, 실제 탑승하려면 검문소를 통과해야 했다) 열차가 잠시 쉬고 있는 커다란 홀 안에는 9m 높이의 거대한 청동상(The Meeting Place)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각가 부부의 모습을 본딴 이 상은 처음 설치되었을 때는 많은 시각예술가들의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적 반응은 괜찮아진 모양이다. <론리 플래닛> 2011년판에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소'로 소개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긴, 이 날 답사에서 우리 일행은 오래간만에 만난 사람들이 이 상의 모습처럼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역마다 볼 수 있었다. 기차역보다 훌륭한 만남의 장소는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눈으로 보여준 덕에, 대중적 평가는 뒤집힌 것 아닐까 싶었다.

▲그림 3 세인트판크라스 역 내부. 'I want my time with you'라고 적혀 있다. ⓒ전현우

유스턴 역

역 구석에서 풍겨오는 디젤 냄새를 뒤로 한 채(국제역 양 편으로 광역망 열차가 출발하는데, 아직 전철화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다), 우리는 유스턴 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국 서북부로 가는 고속철도(HS2) 출발 승강장 공사로 한 켠은 어수선한데, 사람들은 광장부터 대합실 내부를 꽉 메우고 있었다. 광장 벽에는 걷기와 공공 교통을 결합해 이동하는 것이 기후위기 시대 우리의 도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유스턴 역은 영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철도 노선인 서해안 본선(West coast main line)의 출발역이니, 과연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을 하며 역 곳곳을 살펴보았다. 최대 규모의 민자 프랜차이즈인 아벤티 웨스트코스트의 열차가 드나드는 곳 앞에, 네트워크 레일 깃발이 깃대와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었다.(그림 4) 하필 노동당 정부의 출범 첫 날부터 열차를 지연시킨 회사의 본거지에서 이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 아직 방대한 중복 비용에 휘감겨 있는 영국 철도의 현실을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유스턴 역 광장에는 광장의 열차 시각표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무리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들 사이에 호주 해안선을 디바이더로 그리고 있는 항해사 매튜 플린더스(1774~1814)의 동상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왜 그의 동상이 여기 있었는지 확인해 보니, 그의 무덤이 있던 공원이 유스턴 역이 확장되며 철도 시설로 바뀌었던 모양이다. HS2 역을 짓고 있는 부지 아래에서, 그의 유해 또한 찾아냈다고 한다. 플린더스는 승강장 저 아래에 무덤이 파묻힌 대신,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역 광장에 자신을 기억하는 동상을 얻은 사람인 셈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커다란 터미널 역을, 역사적 기억으로도 연결해 주는 이들 동상이 여행객으로서는 반가웠다.

한국에도 비슷한 무덤이 있을 것이다. 경부선 철도를 처음 놓을 때 수많은 무덤이 자리한 토지를 강제 수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던가? 옛 용산기지처럼 홍수, 식민지배, 전쟁, 폭격, 경제발전을 모두 겪었고, 이 모든 것들을 누빈 기차들이 최후를 맞았던 곳도 있다. 왜 아직, 이들 공간은 기억을 잇는 곳은 되지 못하고 있을까. 답 없는 질문을 곱씹으며 다음 역으로 향했다.

▲그림 4 유스턴 역 앞의 네트워크레일 깃발(붉은 깃발). ⓒ전현우

▲그림 5 매튜 플린더스의 동상. ⓒ전현우

고속철도 공사 현장 덕에, 어수선한 길 사이를 헤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순환선(Circle line)의 유스턴 스퀘어 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낯설고, 역 이름마저 비슷한 곳에서 당황하여 헤메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는 순간이다.

메릴번 역

다음 목적지, 메릴번 역(4)은 유명한 셜록 홈즈의 동네에 있었다. 실재하지 않았던 주민 덕에 가장 유명한 베이커 스트리트 역은 세계 최초의 지하철 풍경 삽화로도 유명한 곳이다. 아직 조선은 철종 연간이던 1863년, 지하로 달리는 도시철도가 현실이 된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이 역의 기둥에는 1863년 당시 체결된 락 볼트가 남아 있었다. 벽체와 기둥을 보강하는 단순한 토목 구조체가, 말없이 그러나 단단하게 지난 161년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림 6 베이커 스트리트역 승강장 내부의 안내판 및 락볼트. ⓒ전현우

홈즈의 집 앞에 장사진을 친 사람들을 지나 매릴번 역으로 접어들었다. 네트워크 레일 봉고차, 주말을 맞아 축제를 맞은 듯한 다양한 인종의 가족 단위 사람들, 그리고 역시 열차를 놓칠세라 뛰어가는 사람들.. 상대적으로 한적한 주택가 가운데 있는 역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붐볐다. 한때 폐역 위기에 몰렸던 역임에도 살아나는 덴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도심에서 살짝 벗어나 있고, 지하철 역도 하나만 접속되는 곳임에도 여전히 철도의 힘은 강했다.

이 역이 폐역될 뻔 했던 것은 영국 국철의 수지가 악화일로를 걷고, 따라서 투자도 부실해지던 1980년대의 일이다. 애초에 이 노선은 런던의 터미널역 가운데 아주 늦게 생긴 편이며, 그만큼 중장거리 간선보다는 버밍엄과 런던 사이의 틈새 시장을 노린 영업을 주로 하던 노선이었다. 1983년 국철은 이 역을 폐지하고 버스 터미널로 개발하겠다는 방침을 밝힌다. 지역 주민들의 폐역 반대 운동에도 1984년 이 역의 이용객은 하루 400명 수준, 즉 간이역 수준으로 떨어진다. 세계적 메가시티 한 가운데에서 믿기 어려운 실적이었다. 그러나 1986년 시설 현대화가 결정되고, 노선 고속화나 증편, 환승 시스템의 개선, 네트워크 확장 등이 이뤄지며 2010년대에는 승하차 실적이 하루 4만 명을 넘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 정도 규모라면 철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처리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런던의 도로를 지배하는 2층 버스의 위압적인 운전이 이 한적한 동네 도로 근처에서 더욱 더 흔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죽음 직전에서 극적으로 돌아온 역이 이 역인 셈이다.

우리는 이런 시도 가운데 하나가 자전거와 철도를 결합하는 것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공간 효율이 높을 수 없는 자동차 환승 주차장이 아니라(사실 런던 도심은 이런 게 아주 어려운 곳이다), 자전거 환승 주차장(?)이라고 할 만한 곳이 플랫폼 한 켠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확보되어 있던 공간을, 계속해서 이동을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남겨둔 덕에 메릴번 역이 되살아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모습 같았다.

▲그림 7 메릴번 역 구내의 자전거 주차장. 승강장 바로 옆에 있다. ⓒ전현우

패딩턴 역

우리는 막 발차한 열차가 내뱉은 디젤 냄새가 가득한 메릴번 역을 지나, 패딩턴 역(5)으로 걸었다. 소호의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지나, 많은 공사 현장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패딩턴 역의 광장이었다. 어렵게 지켰을 것이 틀림 없는 꽤 널찍한 계단식 광장 앞에 수많은 시민들이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쪽으로는 다국적 호텔 체인의 호텔 건물이, 그리고 다른 쪽으로는 역 내부 공간으로 이어지는 열린 공간이 대조를 이루는 이 모습은, 오늘의 거대 도시를 이끄는 두 힘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물론 철도가 없으면 이 모든 것도 없을 것이다.

런던의 터미널 역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는 이 역은 대 서부본선(Great Western Main Line)이 출발하는 역이다. 승강장에는 이 노선을 기획한 엔지니어 이섬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의 동상이 다리를 꼰 채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는 이 노선에 표준궤보다 705mm나 넓은 2140mm 궤간을 적용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당시 증기기관차의 특징 때문이었다. 기관차의 보일러를 표준궤보다 훨씬 더 크게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견인력과 속도를 증대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존 네트워크의 힘은, 그리고 더 저렴한 건설비용의 힘은 더 강했다. 브루넬 광궤용으로만 특수한 열차를 만들어서는 수지가 맞지도 않았다. 브루넬 광궤는 브루넬 사후 몇 년만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하나의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의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학사 속의 일화다. 브루넬 동상은 지금 자신이 견제하려던 표준궤가 자신이 지은 역 안을 가득 메운 상황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런던은 이렇게 자본을 손에 쥔 자본가들만 기억하는 도시는 아니다. 우리는 오는 길에 에지워드 로드 역 앞의 고층 빌딩(캐피털 하우스)앞에서 창문닦이공의 동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사다리를 멘 채 자신이 닦은(또는 닦아내야 할) 수많은 유리창을 바라보는 모습이었다. 이런 동상이 곳곳에 있는 이 도시는, 보통 사람들이 흘렸고 앞으로도 흘릴 땀의 가치 역시 늘 되새길 수 있도록 만드는 도시다. 물론 이렇게 걷는 사람 곁에 동상이 자리잡을 수 있으려면, 그만큼 보행자에게 충분한 공간이 허락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림 8 창문닦이공의 동상. ⓒ전현우

하지 언저리의 햇빛은 뜨거웠다. 기후 관련 데모가 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는 곳을 지하철로 그냥 지나기로 했다. 순환선은 시민들과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인파에 휩쓸려 열차에 오르다 튜브 다른 노선들보다 차량의 덩치가 훨씬 더 크다는 데 생각이 닿았다. 한국 차량과 비슷한 객차 넓이였다. 나중에 건설된 노선은 터널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지금 설비에 딱 맞춰 지었지만, 19세기에 만든 노선들은 증기 기관차가 다니던 터널이라 큰 차량을 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주 오래된 네트워크다보니 나타나는 역설적 상황이고, 과거부터 있던 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수리해 사용한 덕에 나타난 이득이기도 할 테다. 한국의 도시에 지금 짓는 망은, 이들처럼 200년 뒤에도 계속해서 쓰일 수 있을까. 아니면 부동산 광풍 앞에서 지하로 파묻혀 매일같이 지연되는 지옥철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빅토리아 역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우리는 빅토리아 역(6)에 도달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 그리고 버스 환승장 덕분에 역 전면부는 비스듬하게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이 역은 런던 남서부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다. 남안에서 종착하기보다는 북안에서 종착하는 게 템즈 강 북안의 런던 중심부로 들어오는 데 편하다. 특히 빅토리아 역은 왕궁이나 웨스트민스터 성당 등 영국 정치의 핵심적인 시설들이 있는 지점이었다. 이들 지역으로 직접 걸어들어올 수 있는 위치를 찾아, 1860~62년에 들어선 역이 이 역이다.

이 역은 처음에는 동측 브릭튼, 서측 채텀 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19세기 동안에는 채텀 측면은 복잡한 지분 관계에 따라 민간회사에게 임대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1923년 '대형 4사'(big 4)로 합병된 이후 하나의 역으로 통합 관리되었다. 국유화 이후, 한참 영국 국철이 수익성을 개선할 방법을 찾던 때는 쇼핑몰이 들어서기도 했다. 물론 그 아래에는 추가 승강장도 들어섰다(16, 17번 홈). 부지를 팔아버리지 않고, 오히려 열차 처리량을 계속해서 늘렸다는 말이다. 덕분에 이 역은 런던에서 두 번째로 승객이 많은 역의 지위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역시 방향을 잃고 헤맬 뻔 했는데, 다행히 바닥에 표시된 색 띠 덕에 주요 부분을 돌아다니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우리는 이 역에서 조금 야박(?)하다고 할 만한 안내를 보았다(찾아보니 다른 역부터. 시각표상 출발시간 45초 전에 문을 닫아버리겠다는 말이었다. 정시 운전을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차를 놓친 승객의 경험은 고려하지 않는 운영자 위주의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고, 오히려 정시 운행을 하지 않아 미리미리 온 승객들이 겪는 시간 손실을 더 중요시하는 판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철도는 다른 수단보다는 불필요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적어서 편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직관이라, 야박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만.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맞긴다.(유럽 여러 나라에서 하는 모양이라 사실 민영화의 폐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계속)

[전현우 서울시립대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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