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석으로도 아무것도 못하는 민주당 [김지현의 정치언락]
“민주당이 총선에서 그렇게 크게 이기고도 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
지난주 만난 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이해찬 전 대표가 이런 걱정을 하더라”며 이같이 말했습니다. 민주당이 21대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180석이나 만들어줬는데 대체 뭐 했냐.”
지난 총선 과정에서 민주당 의원들이 지지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질타라 하죠. 이재명 당시 대표가 “22대 국회에선 달라지겠다”고 초장부터 풀악셀을 밟았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22대 국회가 문을 연 지 고작 두 달 만에 벌써 또 다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겁니다.
● ‘일하는 국회’ 만든다더니…
“‘지난 총선 때도 180석을 줬는데도 뭘 했냐’는 소리를 그동안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또 이렇게 주셨는데도 못하면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총선 때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던 이해찬 전 대표는 총선 다음날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발언을 신호탄으로 민주당은 22대 국회가 문을 열기도 전부터 대여 초강경 모드에 돌입했죠.
당 차원에서 밀어붙이겠다고 발표한 ‘중점 추진 법안’만 무려 57개였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총선 때 공약했던 전 국민 25만 원 민생회복지원금 관련 특별법을 비롯해 채 상병 특검과 김건희 특검 등이죠. 그리고 5월 30일 22대 국회가 문을 연 직후 민주당은 이를 포함해 45개에 이르는 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습니다. 당론으로 정해지면 자당 의원들도 동의하든 안 하든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지난달 곽상언 의원은 당론으로 정해진 ‘박상용 검사 탄핵안’에 기권 표를 행사했다가 원내부대표 자리에서 쫓겨나듯 물러나야 했습니다.
민주당은 그렇게 당론으로 채택한 법안들을 상임위 숙려기간 및 법안 소위 심사 등 기본 절차도 생략한 채 줄줄이 초고속으로 처리했습니다. 개원 당일(5월 30일) 발의된 채 상병 특검법은 숙려기간을 생략하고 6월 12일 소관 상임위인 법사위에 상정돼 9일 만에 야당 단독으로 통과했습니다. 거의 자체 ‘패스트트랙’ 수준입니다.
1호 당론 법안이었던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법’도 7월 18일 소관 상임위인 행안위를 통과한 데 이어 같은 달 31일 법사위를 야당 단독으로 통과했습니다. 8월 1일 본회의도 물론 야당 단독으로 통과했고요. ‘방송4법’도 모두 같은 방식, 비슷한 스피드로 본회의까지 속전속결로 통과했습니다.
● 입법 독주에 거부권으로 ‘반사’
이렇게 본회의까지는 민주당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국회 밖에는 윤석열이라는 대형 장벽이 있었으니까요.
윤 대통령은 이번 주 여름휴가를 떠나지만, 휴가 중에도 민생회복지원금법과 방송 4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크다 합니다. 미국 출장 중에도 전자결재로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던 분인데 휴가 중이라고 못 할 것 없겠죠. 민주당은 5일 열리는 8월 임시국회 첫 본회의에서 노란봉투법도 강행 처리할 예정이지만, 이에 대해서도 윤 대통령의 거부권이 예상되는 바입니다. 노란봉투법 역시 이미 21대 때 한 번 거부권을 행사했던 법안입니다.
이렇게 되면 윤 대통령은 5년 임기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21번의 거부권을 행사하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다만 정치적 부담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여권에선 미국 대통령들의 거부권 사례와 비교하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635번,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414번, 비교적 최근에는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12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12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0번, 조 바이든 대통령도 11번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더 이상 ‘빅딜’이 아닌 일상처럼 되어가는 듯 합니다. 입법 독주하는 야당과 거부권으로 막는 대통령이 서로를 향해 “쫄리면 뒤지시던가”라고 치킨게임을 벌이는 수준입니다.
민주당의 한 원로 정치인은 “민주당이 윤석열을 간과했다”며 “윤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을 계산하거나 여론 눈치를 보지 않는다. 마치 잃을 게 없는 사람 같아서, 민주당이 아무리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결국엔 민주당이 지는 구조다”라고 하더군요.
실제 요즘 민주당 내에선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법을 통과시키면 뭐 하냐, 어차피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물거품”이라는 불만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중입니다. ‘일하는 국회’를 표방하며 밀어붙였건만 오히려 더 아무것도 안 되고 있다는 거죠. 이런 불만은 민심에도 서서히 반영되는 듯 합니다.
● 소득 없이 167시간 청문회
민주당은 ‘일하는 국회’를 내세워 상임위별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청문회도 열고 있습니다. 개원 직후 야당 단독으로 열리는 상임위 회의에 정부 관계자들이 불참하자 이들의 국회 출석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청문회를 활용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토록 벼르던 청문회들도 줄줄이 흥행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기껏 채택한 핵심 증인들이 죄다 불출석하는 탓에 새로 나오는 팩트는 없고, 여야 의원들끼리만 밤늦게까지 싸우다 서로 실언만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기억에 남는 건 정청래 법사위원장의 ‘퇴거 명령’과 최민희 과방위원장의 ‘뇌 구조가 이상하다’는 발언 등 뿐입니다. 과방위는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에 대해 유례없는 ‘3일 인사청문회’를 벌였지만, 이 위원장은 임명 당일 기어이 MBC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진 임명안과 KBS 이사진의 추천안을 의결했죠. 스코어로만 본다면 민주당이 또 진 겁니다.
일하기는커녕,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는 국회를 만든 건 결국 민주당입니다. 180석일 때도 한 게 없더니, 192석을 얻고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습니다. 물론 민주당은 “이건 다 국민의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건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여당’이라는 또 다른 문제고요, 국회의장부터 법사위원장, 운영위원장까지 독식한 원내 1당에겐 그만큼 책임지고 입법부를 이끌고 갈 의무가 있는 겁니다. 더군다나 유권자들이 192석을 만들어줄 때는 여당을 잘 설득해 꼬인 실타래를 잘 풀어가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을 겁니다. 이렇게 ‘노답’ 식으로 끝장까지 싸우란 건 아니었을 겁니다.
8월 18일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나면 이재명 후보가 다시 민주당 사령탑에 오를 가능성이 농후해 보입니다. 진짜로 일하는 국회를 만들기 위해 내부 전략을 재수립할 때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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