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임윤찬도 거쳐간 ‘하콘’ 전 대표 “극소수 스타 연주자에만 쏠리는 현상 탐탁치 않아”

이강은 2024. 8. 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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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수 더하우스콘서트 예술감독 인터뷰…자택 개조해 빚 져가며 하우스콘서트 20여년 운영
연주자와 관객 모두 서로 숨결까지 느끼며 음악적 교감…공연 종료 후 와인파티는 ‘하콘’ 백미
무대·객석 경계 없이 연주자와 닿을 듯한 관객 몰입도 최고…호르니스트 김홍박 “어떤 공연장보다 하콘 무대가 제일 떨려”
하콘, ‘24시간 프로젝트’, ‘원데이·원먼스 페스티벌’, ‘줄라이 페스티벌’ 등 음악계·공연계 각성케 한 실험 잇따라 선보여
박 감독, 하콘 파산 위기 때 세상 떠난 아버지와 동생 유산으로 버텨…1000회 공연 후 대표직 물러나
“본업이 예술가인데 척박한 우리나라 문화 현실이 나를 기획자로 만들어”…“22년간 할 만큼 했으니 다시 예술가로 돌아갈 것”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은 지난달 내내 저녁마다 클래식 음악에 젖었다. 가마솥처럼 푹푹 찌는 더위든 무섭게 퍼부어대는 폭우든 날씨가 어떤 심술을 부려도 3층 다목적홀엔 작지만 보석 같은 연주 무대가 마련됐다. 더하우스콘서트가 2020년부터 매년 7월 여는 ‘줄라이 페스티벌(7월 축제)’ 마당이다. 한 작곡가의 음악 세계를 한 달간 집중 탐구하는 축제로 올해 그 대상은 독일 낭만주의 대표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1810∼1856). 2020년 베토벤을 시작으로 브람스, 버르토크, 슈베르트에 이어 다섯 번째다. 50평 정도에 불과한 홀에서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피아노 솔로와 포핸즈, 오르간, 실내악, 성악 작품 등 다채로운 슈만 음악 선율이 흘렀다. 축제 기간 피아니스트 문지영,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클라리네티스트 조인혁, 호르니스트 김홍박,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김성호 등 한국 음악계 중추와 피아니스트 장준호, 바이올리니스트 김서현 등 신예까지 연주자 200여명이 참여했다. 발빠르게 표(인당 3만원)를 구한 관객들은 집 거실에서 실황 연주를 즐기는 듯한 호사를 누렸다. 
박창수 더하우스콘서트 예술감독은 “순수 예술 지평을 넓히는 제대로 된 방법을 제시하고, 우상화된 클래식과 연주자에 대한 이미지도 깨트리고 싶어 하우스콘서트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우스콘서트 7월 축제 기간인 지난달 25일 박 대표가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 2층 카페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지난달 25일 찾은 제1052회 하우스콘서트(이하 하콘) 현장. 서울대 음대 교수이기도 한 유명 호르니스트 김홍박이 제자 세 명과 슈만의 ‘4대 호른을 위한 협주곡’으로 첫 무대를 장식했다. 이어 이든 콰르텟 등이 현악4중주 2·3번을 들려주었다. 무대와 객석 경계 없이 연주자가 코앞에 있는 공간 바닥에 앉아 감상하는 음악은 맛이 달랐다. 음향설비가 뛰어난 클래식 전용 공연장에서 듣는 것보다 더 좋았다. 연주자들 심리가 투영된 갖가지 표정과 움직임, 땀방울 등이 고스란히 눈에 담겨서일까. 관객들은 어떤 음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온 감각 세포의 문을 열었다. 연주자들이 공연장 여건과 출연료가 보잘 것 없음에도 어떤 무대보다 긴장하고 특별하게 여기는 무대가 왜 하콘인지 짐작됐다.
공연 종료 후 이어진 조촐한 와인파티 중 만난 김홍박은 “오늘 실수를 좀 했다. 국내외 주요 공연장에서 많은 연주를 했지만 하우스콘서트 무대에 설 때가 제일 떨린다”며 “무대에 설 기회가 적은 제자들도 값진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박창수(60) 더하우스콘서트 예술감독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나타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요절한 권혁주(왼쪽)와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2007년 9월 서울 연희동 하우스콘서트(164회)에서 협연하는 모습. 더하우스콘서트 제공
국내 클래식 공연 및 관람 문화에 큰 획을 그은 하콘은 박 감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2002년 7월 12일 사재를 털어 가정집에서 시작한 하콘을 20여년 운영하며 국내외 많은 연주자가 꼭 서고 싶은 무대로 만든 주인공이다. 현재까지 출연자는 한국 연주자를 중심으로 40여개국 5000명 정도. 스타 피아니스트 김선욱·조성진·임윤찬이 10대 시절 거쳤고,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1928∼2019)와 국내 1세대 피아니스트 신수정·이경숙,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소리꾼 장사익 등 국내외 거장도 함께했다.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박 감독도 종종 실험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클래식에 비중을 두고 국악, 재즈, 실험예술 등 다양한 장르 공연을 펼친 하콘에 그동안 6만여 관객이 와서 즐겼다. 
지난해 10월 하콘 1000회를 기점으로 대표직에서 물러난 박 감독은 “20년이나 (대표를) 했기 때문에 타성에 젖을 수도 있고 나이도 올해 환갑이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는 젊은 피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2007년 9월 연희동 하우스콘서트 현장. 25평 남짓한 공간 마룻바닥에 수십 명 관객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더하우스콘서트 제공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고 하콘을 구상한 건 언제인가.

“대중가요를 좋아하신 아버지 노래를 듣고 자라면서 6살 때 처음 작곡을 했다. 작곡에 소질이 있다고 판단한 부모님이 8살 때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셨다. 한 달 다닌 뒤 피아노를 사달라고 해서 대학갈 때까지 스스로 공부해 쳤다. 1980년 서울예고 1학년 때 친구 집에서 함께 연습하는데 공연장에서 연주할 때와 느낌이 굉장히 달랐다. 마룻바닥으로 음의 미세한 떨림까지 전해졌다. 순간 ‘언젠가 하우스콘서트를 만들어 보자’라고 마음먹었다.”

박 감독은 이후 1983년 서울대 음대 작곡과에 수석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이 적성과 맞지 않자 결국 1986년 4학년 때 관뒀다. 그해 12월 대학로 소극장에서 음악을 활용한 행위(전위) 예술가로 데뷔하고 행위예술협회 설립과 한일 행위예술 교류 축제를 주도했다. 

―원래 행위 예술에 관심이 많았나.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1978년 중 2때 한옥 동네에 살았다. 자정에 맞춰 몰래 나가 열 두 집 대문에 시뻘건 선지를 발랐다. 선지가 흘러 내리는 게 보이도록 그 앞에 불도 피웠다. 후다닥 집으로 돌아왔고 동네가 시끄러웠다. 내성적 성향인데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것 같다. 고2 때 우연히 외국 잡지에서 백남준 선생의 작품 ‘TV부처’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내가 했던 행위들이 개념 예술이 될 수도 있구나 깨닫고 관심 갖게 됐다.”

작곡과 수석이 중퇴하고 행위 예술을 한다니 주변에서 우려하고 만류했다. 하지만 청년 박창수는 쉽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피아노를 불태우고 부수는 공연 등 10여년 간 다양한 예술적 실험을 했다. 당시 작곡과 피아노 연주에 대한 갈증이 생겼지만 음악계는 대학 졸업장도 없는 행위 예술가를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갈증은 어떻게 해소했나. 

“1987년 처음 만났던 아내(고 김영희· 전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 겸 김영희무트댄스 예술감독)의 안무작 배경 음악을 담당하면서다. 서로 공감대가 많아 계속 작업하다 1998년 결혼했다. 5년 전 아내가 세상을 뜰 때까지 30여 작품을 함께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아내는 자신이 기본적인 것 해결할 테니 나에게 예술가의 길을 가라고 했다. 김영희란 사람이 없었다면 하콘은 시작도 못하고 어릴 적 어설픈 꿈에 그쳤을 것이다.”  

―서울 연희동 자택 2층 방 3개를 터 25평짜리 공간을 만든 후 하콘을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2002년 한·일월드컵 때문에 야외 대형 오페라와 뮤지컬 등 대규모 공연이 대세였다. 기초문화 예술을 향유하고 다지는 방법이 아니라고 봐서 반감이 생겼다. 기초과학처럼 기초예술을 바탕으로 대중예술이 발전하는 거 아닌가. 대중문화에만 치우치면 안 된다는 얘길 하고 싶었다. 순수 예술 지평을 넓히는 제대로 된 방법을 제시하고, 우상화된 클래식과 연주자에 대한 이미지도 깨트리고 싶었다.” 
박창수 예술감독이 자택을 개조해 2002년 7월12일 하우스콘서트를 시작한 서울 연희동 집 대문에 걸린 안내판. 더하우스콘서트 제공
―하콘 운영은 어떻게 했나. 연주자 섭외와 운영비 부담 등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

“(매달 두 차례 연) 초기 피아노와 녹음·촬영·음향 장비 설치, 프로그램 구성, 연주자 섭외, 간식 장보기, 와인 구비 등을 혼자 하느라 벅찼다. 또 작은 가정집 공연에 개런티(출연료)가 입장료(인당 2만원) 수입의 절반에 불과한 데다 하콘만을 위한 작품 연주를 조건으로 다니까 거절하는 연주자가 많았다. 나중에는 하콘 출연을 원하는 연주자가 많아졌는데 요청할 때 무시했던 사람은 우리가 거절한다.(웃음)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 연평균 1억원가량 달해 빚도 많이 졌다.” 

와인 파티는 연주자와 관객들이 와인잔을 기울이며 자연스레 어울리는 하콘의 백미다. 티켓 값은 그 돈조차 없어 못오는 관객이 생길까봐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고민 끝에 3만원으로 올렸단다. 하콘 은 2008년 이후 광장동, 역삼동, 도곡동 사진·녹음 스튜디오 등을 거쳐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 배려로 2014년부터 예술가의 집에 자리잡고 매주 한 차례 연다. 다만 장소가 어디든 연주자와 관객 사이 친밀감과 교감을 최우선으로 한 원칙을 지켰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지난해 하콘 1000회 기념 특별공연 때도 일반 객석을 모두 비운채 100명 관객이 무대 바닥에 앉아 관람토록 했다. 
―부자가 아니라면 파산하지 않은 게 대단하다.

“부잣집 아들이 취미삼아 하는 일로 오인한 사람들도 있었다.(웃음) 사실 2016년 파산 위기에 몰렸었다.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SBS문화재단과 문예위가 어느 정도 지원해주고, 그해 아버지와 동생이 연달아 세상을 뜨며 남긴 유산 7억원으로 버틸 수 있었다. 2004년 대학생 때 자원봉사자로 하콘에 들어와 20년 동안 헌신해준 강선애(41) 대표와 한진희 수석매니저(〃) 등 직원과 자원봉사자, 소액후원자 분들께도 감사드린다.”

박 감독과 하콘은 국내 클래식 음악계와 공연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도 많이 저질렀다. 박 감독이 24시간 내내 피아노 즉흥 연주(프리뮤직)를 하고, 연주자 수십 명이 돌아가며 24시간 동안 공연하는 ‘24시간 프로젝트’가 4차례 진행됐다. 하콘 10주년인 2012년, 전국 21개 지역 23개 공연장에서 일주일간 총 100개 하콘 무대를 선보인 ‘대한민국 공연장 습격사건’을 시작으로 매년 7월마다 연 축제도 반향이 컸다. 전국 65개 공공·민간 공연장, 미술관, 학교, 병원, 군부대 등(2013년)과 한국·중국·일본 지역 94곳(2014년)에서 같은 날 동시에 공연한 ‘원데이 페스티벌’, 전 세계 수백 개 도시에서 많은 예술인이 참여해 한 달 내내 다양한 예술을 펼친 ‘원먼스 페스티벌’(2015∼2018년)이다.
하우스콘서트 1000회를 맞아 지난해 10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특별 공연 장면. 관객들이 객석 대신 무대 위 피아노 주변에서 피아니스트 문지영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더하우스콘서트 제공 
―가만 보니 하콘은 박 감독 행위 예술의 연장선 같다.

“맞다. 나의 실험 정신이 작용했다. 정말 우리 음악계에서는 보기 힘든 실험들을 하콘이 한 거니까. 전국에 500석 이상 규모 공연장이 400개다. 이렇게 많은 나라가 드물다. 그런데 정작 음악가들이 설 무대가 없다. 이들 공연장과 좋은 연주자를 연결하면 관객이 올 것이라 보고 각 공연장에서 매달 한 번씩 연간 5000개 공연을 만들겠다고 제안하니 해당 지자체에선 터무니 없는 소리라며 웃더라. 공연장 습격사건과 페스티벌을 기획한 이유다. 공연을 진행한 지자체에선 주민 반응이 좋으니 놀라워했다. 놀고 있는 지역 공연장이 많은데 트로트 같은 것만 할 게 아니라 클래식, 연극, 무용 등 기초예술 장르도 잘 기획하고 개발하면 관객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공연을 원하는) 잠재 관객이 많은데 아예 접할 기회가 없으니 문제다.”

―국내 클래식계도 조성진과 임윤찬 같은 극소수 스타 공연에만 관객이 몰리는데.

“유행 같아서 탐탁치 않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히 좋은 예술가가 많다. 이들이 자주 무대에 서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외면 당하니 안타깝다. 관객들도 (특정 예술가에)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하콘을 유지해온 비결과 하콘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

“누구나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안 하거나 피하고 싶어서 못하는 거지. 무엇보다 꾸준한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본다. 또 좋은 연주자들이 기회가 되면 서길 원하고 뛰어난 역량과 발전 가능성 있는 신인 음악가들을 발굴해 선보이는 무대로 만든 것도 주효했다.

강 대표가 하콘을 잘 이끌어 가고 있지만 내가 했던 것과 다르게 좀 더 창의적으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나는 예술감독으로 2032년까지 구상한 프로그램을 모두 마무리하면 완전히 손을 뗄 거다. 항상 직원들에게 ‘후배는 선배를 반드시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없더라도 하콘은 (건강하게) 생명력을 이어갔으면 한다.”
지난달 25일 하우스콘서트 ‘줄라이 페스티벌’에 참여한 호르니스트 김홍박(오른쪽)이 제자들과 함께 연주에 열중하는 모습. 더하우스콘서트 제공 
―어려운 여건에서도 하콘을 유지해온 비결과 하콘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
“누구나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안 하거나 피하고 싶어서 못하는 거지. 무엇보다 꾸준한 것만큼 무서운 게 없다고 본다.  강 대표가 하콘을 잘 이끌어 가고 있지만 내가 했던 것과 다르게 좀 더 창의적으로 발전시켰으면 좋겠다. 나는 예술감독으로서 2032년까지 구상한 프로그램을 모두 마무리한 뒤 하콘에서 완전히 손을 뗄 거다. 항상 직원들에게 ‘후배는 선배를 반드시 뛰어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하콘은 (건강하게) 생명력을 이어갔으면 한다.”
―앞으로 계획은.

“작곡과 음악 활동을 하는 예술가로 돌아가려 한다. 본업이 예술가인데 우리나라 현실이 나를 기획자로 만들었다. 22년간 기획자로 할 만큼 했으니 학창 시절부터 궁극적 목표였던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 부모 형제와 처자식도 없으니 얼마 안 되는 재산은 유사시 하콘에 귀속되도록 할 것이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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