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배우' 엄태구 "적성 안 맞더라도 직업이니까 잘해야죠"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배우를 직업으로 선택하겠느냐고 묻자, 한참 고민하던 엄태구는 이렇게 답했다. "다른 걸 찾아볼 것 같아요. 이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허허"
연예인 중에서도 소문난 내향인인 배우 엄태구를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소문대로 부끄러움이 많아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도 들릴락말락할 정도로 하는 그가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해내는 걸까.
JTBC 드라마 '놀아주는 여자' 종영을 기념해 진행한 인터뷰에서 엄태구는 "연기할 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준비할 뿐"이라며 "매번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멋쩍게 웃었다.
수줍음이 많은 성격 탓에 남들 앞에 나서는 연기는 늘 어렵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나 더 어려웠다고 한다.
장르물에서 주로 카리스마 있고 무게감 있는 역할을 맡아온 엄태구는 첫 로맨틱 코미디 '놀아주는 여자'의 남자 주인공 서지환 역을 맡아 발랄한 연기 변신을 보여줬다.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전과자들을 위한 회사를 운영하는 서지환은 첫인상은 차갑지만, 소년 같은 순수함을 가진 캐릭터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숙맥'이라 첫사랑 고은하(한선화 분) 앞에서 자꾸만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엄태구는 "계속 어두운 작품만 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이런 밝은) 대본에 끌렸던 것 같다"며 "사실 촬영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잘못하면 이번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마음도 들었다"고 했다.
"처음 해보는 연기라서 더 낯설었던 것 같아요. 어느 현장을 가도 부끄럽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촬영마다 그랬어요. 좀 익숙해졌다 싶어도 다음날이 되면 또 새로 시작하는 느낌으로 민망하더라고요. 8개월 내내 그랬어요."
매 순간 민망했다는 것치고 엄태구의 연기 변신은 꽤 성공적이었다.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매주 발표하는 TV-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출연자 화제성 조사 결과에서 4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신선한 배역을 찰떡같이 소화해냈다는 호평이 나왔다.
엄태구는 "아무리 코믹스러운 장면도 진심으로 연기하려고 했다"며 "진심으로 연기하다 보면 더 땅에 발을 붙인 모습처럼 보일 것 같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큰 도전이었는데, 생각보다 좋게 봐주셔서 너무 큰 용기가 됐다. 시청자분들이 제게 용기가 돼주신 만큼, 저도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2007년 영화 '기담'으로 데뷔한 엄태구는 수많은 작품에서 단역과 조연으로 나오다가 영화 '밀정', '택시 운전사' 등에서 짧은 분량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엄태구는 "연기가 적성에 안 맞는다고 느껴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제 연기가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않기도 했고, 직업이랍시고 연기를 하는데 늘 생활비가 부족하니 고민이 많았었다"며 "특히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현장에 금방 적응해 연기를 조금씩 편하게 해내는 것 같은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들처럼 억지로라도 해볼까 노력도 했는데, 결국 그 후에 더 어색해지고 말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저만의 방법대로 하다가 예능 '바퀴 달린 집'에 출연하게 됐어요. 8개월 동안 아무도 안 만나고, 일도 쉬면서 지내는데 김희원 선배가 밥만 먹고 가면 된다고 하셔서 출연했던 건데, 현장에 사람도 너무 많고 카메라도 많아서 더 말이 안 나오고 적응을 못 했었죠. 제가 되게 답답해하는 제 모습인데, 생각보다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신기했어요. 제가 꼭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은데도 엄태구가 꾸준히 배우로 활동한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엄태구는 "일단 멋있어 보여서 이렇게 힘들 줄 모르고 시작한 연기인데,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은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나있었다"며 "이거 말고 잘하는 게 없었다"고 말했다.
어려운 연기가 재밌게 느껴질 때도 있냐고 묻자 엄태구는 한참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사람 사는 모습이 연기로 담길 때 기쁜 것 같아요. 그래도 힘든 순간이 대부분이고, 아주 잠깐씩 기쁜 순간들이 있는 거죠. 직업들이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허허"
엄태구는 "적성에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어쨌든 선택한 직업이니까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연기할 때도 부끄럽긴 하지만, 모니터에 어색한 모습을 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다"며 "연기할 때만큼은 저지르는 느낌으로 최대한 다른 생각은 안 하고 늘 진심으로 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는 타고난 끼가 있는 동료 배우들이 엄청 부러웠어요. 근데 사람들은 모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각자만의 무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저만의 그런 게 있을 테고 여러분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co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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