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는 물·그늘·휴식…폭염에도 '쉴 권리' 그림의 떡 [심층기획-폭염 속 '작업 중지권' 강화 논란 가열]

이지민 2024. 8. 6.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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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작업중지권’ 권고 그쳐
열사병 등으로 2024년 14명 사망
근로자 휴식 요구 ‘근태불량’ 판단 우려
폭염에도 당당한 쉴 권리 요구 어려워
마트 지하주차장 카트 정리 등 사각지대
고용부 사측 위주 점검 방식도 도마 위
최근 여야 발의된 관련 법안만 총 5건
입법조사처 하계 90.7시간 적용 추정
경영계 “획일적 작업 중지 피해 막대”
고용부도 “이미 관련 규정 있어” 신중론

“휴게실, 에어컨… (그런 건) 여기 하나도 없어요.”

지난달 31일 오전 10시, 서울 영등포구 20층 오피스텔 건설 현장 1층에서 작업복 차림의 김모씨는 턱에 맺힌 땀을 쓸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휴게실에 선풍기나 에어컨, 물이 있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이날 서울의 한낮 기온은 33도까지 올랐고, 오전 10시 기준 기온은 31도였다.
31일 경기도의 한 공사현장에서 건설 근로자들이 폭염 속에서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최상수 기자
김씨가 일하는 공사 현장의 관리소장 말에 따르면 2층에 휴게실이 있고, 선풍기와 정수기도 구비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씨가 “하나도 없다”고 한 이유는 15층에서 일하는 그에게 2층에 있는 휴게실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박세중 건설산업연맹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은 이 같은 현장 상황에 관해 “10층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거기까지 계단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게 더 힘든 일이어서 통상 내려오지 않고 위에서 쉬곤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동자가 쓸 수 없는 휴게실을 휴게실이라고 할 수 있냐”며 “최소 2층에 한 개씩은 휴게실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고 부연했다.

지난달 30일 부산의 공사 현장에서는 60대 인부가 작업 중 열사병 증상으로 쓰러져 숨지기도 했다. 5일 질병관리청은 이를 포함해 올해 폭염에 따른 사망자가 14명이라고 밝혔다. 4일 경기 여주 최고기온이 40도를 넘는 등 무더위가 이어지면서 ‘역대 최악의 폭염’을 기록한 2018년과 같은 상황이 재현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당시 온열질환에 따른 산업재해 건수는 65건, 사망자는 12명으로 역대 최다였다.
고용노동부가 ‘폭염 대비 노동자 건강보호 대책’을 마련했으나 야외 근로자들은 대책이 현장에서 겉돌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책에 따르면 체감온도가 31도를 넘으면 각 사업장은 물·그늘·휴식을 제공해야 하고, 33도(주의단계)가 넘으면 매시간 10분씩 휴식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35도(경고단계)가 넘을 경우 매시간 15분씩 휴식에 무더위 시간대(14∼17시)에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하지만 박 국장은 현재 대책이 강제성 없는 권고에 그치는 탓에 실효성이 없다고 짚었다.

그는 “‘더워서 일을 못 하겠다’고 했을 때 사업주가 ‘근태가 불량하다’는 다른 핑계를 대서 내일부터 못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휴식을 요구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제52조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고, 이를 요구한 근로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해선 안 된다고 나와 있으나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중소 사업장일수록 상황은 더 열악하다. 대형 건설사가 시공하는 아파트 공사 현장 등은 중대재해를 우려해 그나마 관리가 되는 편이지만, 오피스텔처럼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공사 현장에서는 폭염 대비가 주먹구구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씨는 휴게실과 휴게시간 여부를 묻는 말에 “큰 공사장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폭염에도 당당하기 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건 서비스업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6월 마트체인 코스트코 하남점 주차장에서 카트를 정리하던 직원이 폭염 속에서 탈수로 사망한 사고가 일어난 뒤 업계 내 경각심이 생기긴 했으나 근로자들이 느끼기엔 역부족이다.

코스트코 대구점 주차장에서 카트 정리 업무를 하는 이모씨는 다 같이 작업을 멈출 수 있는 건설업계가 오히려 상황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10분을 쉬면 대체할 사람이 제가 있는 자리로 와야 한다”며 “건설업계처럼 일시에 작업을 중단하면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어 “주차장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덥고, 차량이 내뿜는 열기 때문에 대기 온도와 체감온도 차이가 크다”며 “지난해 산재 발생 뒤엔 아침부터 환풍기를 돌리긴 하지만 습도가 80% 넘어가는 날엔 여전히 고역”이라고 토로했다.

폭염일수록 일감이 더 많아지는 배달 노동자들은 ‘기후실업급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폭염, 폭우 등 기상이 악화할수록 배달 수요가 늘어난다는 점이 라이더들 겪는 모순”이라며 “정부가 플랫폼 운영사에 온열 질환 예방조치를 이행하도록 권고하지만 말 그대로 권고이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폭염·폭우 시에 일을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기후실업급여를 만들어야 한다고 부연했다.
31일 서울 영등포구 오피스텔 건설 현장 1층에 별도 휴게시설이나 냉방 장치 없이 정수기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모습. 이지민 기자
노동계는 고용부의 점검 조치도 미흡하다고 본다. 올해 5월 고용부가 폭염 대비 대책을 발표할 당시 ‘지난해 점검 대상(2471곳)의 77%가 폭염 시 정기 휴식을 취하게 해 근로자들을 보호했다’고 했는데, 점검 방식이 잘못됐다는 분석이다.

강한수 건설노조 수석부위원장은 “건설사 측이나, 현장 소장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작업 중지권이 잘 이행되고 있다고 하지 않겠느냐”며 “현장 노동자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해야 맞다”고 말했다. 고용부 측은 올해도 점검을 계획하고 있는데 조사 방식 변경은 현재 검토하지 않고 있다.

건설노조가 지난달 27∼28일 건설 노동자 1575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체감온도 35도 이상일 때 옥외작업을 중지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80.6%가 ‘중단 없이 일한다’고 했고, ‘작업이 중단된 적 있다’고 한 응답은 19.4%에 그쳤다. ‘폭염으로 작업 중단을 요구한 적이 있는지’에 관한 물음에는 89.0%가 “요구한 적 없다”고 했고, “요구한 적 있다”는 응답은 11.0%였다.
31일 경기도의 한 공사현장에서 건설 근로자들이 폭염 속에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 중지권, 생산성 감소 막아”

노동계에서 실효성 있는 작업 중지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에서도 관련 법안이 발의되고 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여야 합쳐 작업 중지권을 강화하는 취지의 법안이 총 5건 발의됐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산업안전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 입법영향분석’ 보고서에서 작업 중지권이 강화할 때 영향을 분석했다. 산안법 제52조의2(기후여건에 따른 작업 중지)를 신설할 때를 가정한 분석이다. 보고서는 작업 중지권을 강화하면, 장기적으로 노동생산성 감소를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실제 작업 중지 명령이 시행될 경우 여름철 90.7시간, 겨울철 43시간 작업이 중지될 것으로 추정했다. 최근 6년간 발령된 평균 폭염 경보가 연간 12.2일, 한파경보가 5.8일이라는 점이 근거다.

이에 대해 경영계는 현행 산안법 39조에 이미 사업주가 고온(폭염), 저온 등에 의한 건강장해 예방을 위한 보건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며, 법 개정을 반대하고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폭염특보와 같은 재난경보 기준으로 획일적인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면, 산업 현장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소기업중앙회도 “폭염과 한파에 따른 작업 중지가 이뤄진다고 가정하면 연간 20일의 작업 중지일이 발생할 것”이라며 “생산량 감소, 납기일 지연, 수출 경쟁력 저하 등 부작용이 심각할 것”이라고 했다.

고용부도 경영계가 언급한 “이미 관련 규정이 있다”는 점을 들어 법 개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법률 개정의 실익, 작업 중지 명령의 요건 등을 고려해 법 개정은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폭염·폭우·태풍 특별대응 기간을 운영하는 등 폭염에 취약한 현장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지민 기자 aaaa3469@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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