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떠나자 지방 소아 병원 무너져... 응급실 가려면 2시간

안준용 기자 2024. 8. 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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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아 응급실 덮친 의정갈등 후폭풍
아주대 응급센터 건립 일단 연기
병원 경영난… 전문의들도 이탈
의정 갈등이 7개월째 이어지면서 의사 이탈로 인해 필수 의료인 소아 응급 의료가 위기를 맞고 있다. 병원 경영이 악화하면서 간호사들의 발령 대기 상태도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소아 전문 응급 의료 센터 표지판 앞을 지나는 의료진의 모습. /장련성 기자

지난 2월 전공의 집단 사직서 제출로 시작된 의정 갈등이 7개월째 이어지면서 대표적인 지역·필수 의료인 ‘지방 소아 응급 의료’가 위기를 맞고 있다. 그간 소아 응급실을 지켜온 전문의들이 과중한 업무 부담 등으로 이탈을 본격화하면서 진료 공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경기 남부 지역의 소아 응급 의료 거점인 아주대병원 소아 응급실은 현재 수요일과 토요일엔 심정지, 호흡곤란 등 응급 처치가 필요한 초중증 환자만 받는 ‘축소 진료’를 하고 있다. 올 초만 해도 전문의 8명이 있었는데, 이 중 2명이 병원을 떠난 데 따른 조치다. 일반 응급실 내에서 성인·소아 환자를 나눠 보던 이 병원은 지난 6월 말까지 ‘소아 전문 응급 의료 센터’를 짓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전공의 부재와 환자 수 감소에 따라 병원 경영난이 가중되면서 공사도 중단됐다.

일각에선 병원 경영난으로 간호사 채용도 이뤄지지 않으면서 의료계 전체 인력난이 극심해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간호계 관계자는 “올해 상급종합병원 발령 예정이던 간호사 1만여 명 중 2000여 명만 근무 중”이라며 “병원을 지키는 인력은 번아웃(극도의 피로)에 빠지고 있다”고 했다.

아주대병원이 있는 경기 서남권 지역은 전국 29권역 가운데 18세 이하 인구 비율(15%)이 가장 높다. 아주대병원은 충청권 환자들까지 받으며 지역 소아 응급 의료의 중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 부담과 소아 응급 의료의 진료·소송 리스크 등이 발목을 잡았다. 병원 관계자는 “소아 응급 진료를 전담할 의사를 구하려 해도 한두명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길 반복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래픽=송윤혜

현재 이 병원 응급실에선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전문의 한 명,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다른 전문의 한 명이 소아 환자들을 책임진다. 이지숙 응급의학과 교수는 “환자들이 특히 많이 오는 밤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는 너무 바빠 화장실 갈 틈도 없다”고 했다. 이 병원 소아 응급실 환자는 작년 9월 2635명이었다. 하지만 전문의 한 명이 응급 환자를 도맡다 보니 지난 6월엔 환자가 1163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인력이 줄고 환자가 줄면서 병원은 수익을 내지 못해 경영이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경기도는 지난 2월 공모를 거쳐 중증 소아 응급실을 24시간 운영하는 ‘소아 응급 책임 의료 기관’으로 아주대병원 등 4곳을 지정했지만, 현재 계획대로 운영을 시작한 곳은 분당차병원 한 곳뿐이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강원도 영동 지역은 의정 갈등 이후 야간에 소아 응급 환자를 받아주는 대형 병원이 사실상 없는 상태다. 소아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119 구급대가 2시간 이상 떨어진 춘천·원주의 대형 병원으로 가기도 한다. 전국 최초로 소아 전문 응급 의료 센터로 지정된 순천향대 천안병원은 지난 5월 마지막 남은 전문의 한 명이 병원을 떠나면서 16세 미만 중증 질환자는 받지 못하고 있다.

곽영호 대한소아응급의학회장(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은 “소아 응급 환자 진료는 보상은 턱없이 낮은 반면 노동 강도, 진료·수술 리스크는 상당히 높다”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의정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간호사 인력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정부는 전공의 집단 사직에 대한 대응책으로 진료 지원(PA) 간호사를 현재 1만3000여 명에서 약 2만명까지 대폭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전공의 빈자리를 PA 간호사와 전문의로 대체해 상급종합병원의 구조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공의 이탈 후 병원 경영난이 가중돼 간호 인력 수급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형 병원은 매년 상반기 신규 간호사 모집 공고를 내고, 하반기에 채용을 마친다. 최종 합격한 간호사들은 이듬해 3월부터 순차적으로 발령을 받는다. 하지만 올해 상급종합병원 발령 예정이던 간호사 1만여 명 가운데 실제 근무를 시작한 간호사는 200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는 이른바 ‘웨이팅게일’이다. 웨이팅(waiting)게일이란 영국 간호사 나이팅게일에 빗대 신규 간호사로 뽑히고도 병원 사정 때문에 발령 대기 상태로 계속 기다리는 이들을 가리키는 간호계 은어다.

이에 더해 올해는 대형 병원 대부분이 신규 간호사를 뽑지 않는다. 올해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23곳 중 신규 간호사를 뽑는 곳은 중앙대병원 한 곳뿐이다. 강원대병원은 올해 신규 간호사 80명을 뽑는 데 1679명이 지원해 21대1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 병원의 지난해 경쟁률은 3.4대1이었다.

일부 대학에선 간호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휴학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 졸업자보다는 졸업 예정자가 취업에 유리하니 일단 휴학하고 병원 채용 사정이 나아지길 기다려보라는 것이다. 서울의 한 대학 간호학과 4학년 A씨는 “교수님 권유대로 올 2학기는 휴학할 예정”이라고 했다. 채용 대기 기간에 미국 간호사 면허 시험인 ‘엔클렉스(NCLEX)’를 준비하는 이들도 최근 크게 늘었다고 한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간호사 채용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간호 인력 이탈이 가속되고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원하는 적정 수준의 간호 인력도 확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소아 전문 응급의료센터

소아·청소년 응급 환자 진료를 위한 장비를 갖추고 24시간 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상주하는 응급실. 소아·청소년 전용 병상과 진료실·처치실 등을 갖추고 있다. 전국에 11곳이 운영 중이다.

☞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의사를 보조하는 간호사. 수술 준비와 보조, 수술 부위 봉합 등 의사 업무 일부를 담당한다. 미국·영국 등에선 법으로 규정된 직역이지만, 우리나라 의료법엔 근거 규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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