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영한 (4) ‘하나님 중심의 신앙 실천’에 열정 바친 대학 생활

양민경 2024. 8. 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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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니 기독교학생회가 있었고 복음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선배들의 신앙모임도 있었다.

기독 학생들이 매일 강의실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정오 기도회를 가진 것은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됐다.

기독학생회는 그를 강사로 모시고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통일교 비판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을 설교해 대학생에게 감동을 줬고 훗날 여의도로 이전해 세계적인 교회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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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중생의 은총 이후 신앙생활 나침반 삼아
늘 기도로 학업 준비하며 기독학생회 섬겨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1971년 2월 서울 종로구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졸업식 당시 찍은 사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니 기독교학생회가 있었고 복음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선배들의 신앙모임도 있었다. 기독 학생들이 매일 강의실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정오 기도회를 가진 것은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됐다. 철학을 전공, 종교학과에서 신학을 부전공하면서 세상 학문 책을 읽기 전에 늘 기도하고 성경을 먼저 읽었다. 당시 종교학과 신사훈 교수의 영향이 컸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대학생 시절 나를 붙잡고 미래 삶의 방향을 정해준 말씀이다. 17살 때 중생 체험 이전에는 교회에 나갔으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이 없었다. 중생의 은총 이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나침반이 생긴 것이다. 이 구절은 대학에서 생활하던 젊은 시절 내 열정을 불태우는 영적 활력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문선명 통일교가 대학가에 침투해 원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전도 활동을 했다. 이때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의 신사훈 교수는 기독 학생에게 정통 신학을 가르쳤다. 미국 드루대 박사 출신의 신 교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숙했고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초교파적으로 교회 친화적 신앙 운동을 펼친 신학자이기도 하다. 기독학생회는 그를 강사로 모시고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통일교 비판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강연 도중 통일교도들이 똥바가지를 신 교수 얼굴에 뒤집어씌우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통일교 활동을 제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주간 잡지’가 젊은 여성의 선정적인 모습을 표지에 장식했다. 서울대 기독 학생은 성도덕을 퇴폐화시키는 이런 행위에 항의했다. 문리대 학생회 이름으로 주간 잡지사의 모든 옐로페이퍼 수십 개를 모아 동숭동 4·19기념탑 앞에서 소각식을 거행했다. 시민들에게 건강한 성도덕 의식을 알리자는 의도였다.

매해 7월 방학 기간 전국 기독 학생을 초청해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에서 ‘전국 기독 학생 대회’를 개최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내걸고 동료 대학생의 복음주의 신앙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대회 주요 강사는 한철하 아신대 초대학장과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이었다. 당시 서대문에서 순복음교회를 개척해 성령 운동을 한 젊은 목회자인 조용기 목사도 강사로 모셨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을 설교해 대학생에게 감동을 줬고 훗날 여의도로 이전해 세계적인 교회를 이뤘다.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해 하나님 중심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내 대학 생활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기독학생회를 열심히 섬겼다. 이렇듯 보수 신앙으로 사상의 방향을 설정한 건 출신 교회에서 배운 칼뱅주의 신앙 덕이었다. 이때의 믿음이 신앙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는 독일에서는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론 신학,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등이 신학계를 주도했다. 미국에서는 폴 밴뷰런, 토머스 알타이저의 사신(死神)론 신학, 하비 콕스의 세속화 신학,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종교 혼합운동, 종교 다원주의가 세계 교회를 주도했다. 이에 성경적으로 대응하는 정통 신학이 요청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보수 교회는 독일 신학을 혐오했으나 나는 독일로 가 이들의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기로 했다. 이를 공부해 정통 개혁신학을 변호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독일 유학의 뜻을 놓고 홀로 예배당에서 기도하곤 했다. 독일문화연구원을 다니며 독문 강독과 독일어 회화도 열심히 준비했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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