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민주주의와 수 그리고 국민 눈높이
임신 6개월밖에 안 된 아내에게 남편이 왜 아기를 낳지 않느냐고 따졌다. 아내가 아직 10개월이 되지 않았는데 아기를 낳으라니 제정신이냐고 대들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6을 ‘사사오입’하면 10이 되지 않느냐? 그러니 지금 임신 10개월이나 마찬가지니 아기를 낳으시오.”
이는 자유당 시절 헌법 개정을 강행하면서 가결 정족수를 ‘사사오입’이라는 수학에서의 반올림 법칙을 인용해 강제로 통과시켰을 때 유행한 말이다.
1954년 총선에서 집권당인 자유당은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개헌선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는 몇 석이 부족했다. 지금 민주당과 국민의힘 원내 의석과 비슷한 상황. 그래서 1954년 11월29일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은 중임제를 두지 않는다는 개헌안 표결을 했는데 재적 203명 중 202명이 출석해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가 나왔다. 찬성에 필요한 203명의 3분의 2 이상은 135.333...명.
그러니까 1명도 아닌 0.333...명이 부족한 것으로 당연히 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야당인 민주국민당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러자 자유당 강경파들은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135.333명은 반올림(사사오입)하면 135명이니 개헌안은 통과된 것이라는 해석을 내렸고 자유당은 다음 날 국회를 열어 전날 ‘부결’을 취소하고 ‘개헌 통과’를 선언했다. 그러자 야당이 거센 항의를 하는 등 국회는 난장판이 됐고 김영삼 의원(후에 대통령) 등 소장파 의원 다수가 자유당을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0.333’의 숫자가 일으킨 정치적 마법은 그대로 굳어졌고 이로부터 자유당 정권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렇듯 민주주의에서 수는 굉장한 힘을 갖는다. 단 1표라도 많으면 그것으로 판정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칫 고래를 두고 상어라고 주장하는 쪽이 단 1표라도 많으면 고래가 상어로 둔갑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인류가 발명한 최선의 정치제도가 갖는 강점이면서 약점이 되기도 한다. 더욱 그 다수의 한도가 반을 넘어 3분의 2 선에 육박할 정도가 되면 그럴 위험성이 높다.
지난 24일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시작됐는데 이때 민주당 의원 중에는 ‘이진숙 후보자가 몇 달 안 가 탄핵을 당할 텐데...’라고 했다. 그 의원의 입에서 ‘탄핵’이라는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임명도 되지 않아 업무 수행에 법을 어길 기회도 없는 후보자에게 ‘탄핵’이라는 말이 스스럼없이 나오다니.... 그리고 마침내 이 위원장 취임 하루 만에 민주당은 국회에서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갖는 수의 힘이다. 그것이 고래가 되건 상어가 되건 무엇이든 결정할 수 있는 힘이다.
사실 최근 들어 방통위원장으로 이동관씨가 임명됐으나 ‘탄핵’ 직전에 사표를 냈고 다시 김홍일씨가 임명됐으나 몇 달도 못돼 ‘탄핵’의 위협에 자리를 떴다. 이상인 방통위원장 직무대리까지 탄핵안이 제출되자 사표를 내는 바람에 결국 방통위원은 0명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솔직히 22대 국회가 시작된 이래 그동안 국회가 민생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은 특검이니 청문회니 하는 것뿐이고 코미디 같은 막말과 저질 싸움뿐이다.
심지어 정청래 법사위원장은 증인의 태도가 불성실하다며 10분간 퇴장을 명하는가 하면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에 대해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은 “후보자의 뇌 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고까지 했다. 이 배경이 바로 민주주의 ‘수’의 힘이다. 그 힘이 저질 코미디인지 충정 어린 애국심인지는 국민의 판단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서운 ‘국민의 눈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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