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임이네, 물가의 잡초 같은 탐욕의 여인 [김민철의 꽃이야기]

김민철 기자 2024. 8. 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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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회>

고마리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고마리는 전국적으로 개울가·도랑 등 물가나 습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입니다. 너무 흔해서 잘 눈여겨보지 않는 풀이기도 합니다. 무성한 잎만 보이다가 8월 들어서면 예쁜 꽃까지 하나 둘씩 피기 시작하는데 흰색 바탕에 끝에 분홍빛이 살짝 도는 매력적인 꽃입니다. 어느 분 비유대로 ‘하얀 꽃잎 끝에 발그스레하게 연지를 찍은 듯한 작은 꽃’입니다. 분홍빛 없이 흰색 꽃으로만 피는 고마리도 있습니다.

고마리 꽃과 잎.

◇임이네, 물가의 잡초같이 무성한 생명력

고마리를 보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임이네가 떠오릅니다. ‘토지’에 임이네가 없으면 소설을 읽는 재미가 덜할 것이 분명합니다. 소설 1부에서 3부까지 임이네 역할이 적지 않은데다 강렬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임이네는 ‘매우 건강하고 이쁘게 생긴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 행실이 좋지 않았습니다. 임이네는 새벽에 몰래 남의 집 호박을 훔치다가 마침 용이를 만나고 가는 월선이와 마주칩니다. 임이네는 월선이가 다녀간 것을 동네방네 소문내 마침내 용이의 아내 강청댁 귀에까지 들어가게 했습니다. 강청댁은 삼십리 밤길을 달려가 월선이에게 행패를 부립니다. 임이네라는 호칭은 딸 ‘임이’ 엄마라는 뜻입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엔 친정 마을 이름을 따서 ‘~댁’, 아이가 태어나면 아이 이름을 따서 ‘~네’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임이네는 훤칠하고 잘생긴데다 성격도 부드러운 용이에게 추파를 던지곤 했습니다. 이를 묘사하는 대목에 ‘물가의 잡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자주빛 옷고름과 끝동을 물린 흰 무명저고리의 옷섶 앞이 벌어져 있었다. 검정치마도 불룩하게 솟아 있었고 몸 풀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임이네 얼굴은 좋았다. 뭣인지 불사조 같은, 물가의 잡초 같은 끈질긴 것을 느끼게 하는 이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건강하고 넘쳐 있는 것 같다. (중략) 여자는 염치불고하고 용이의 눈을 더듬어본다. 풍만한 정기(精氣)를 풀어서 용이 얼굴에다 설설 뿌리는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그는 임신한 여자였을 뿐 어미가 아니었다. 음탕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었다.>

물가에서 자라는 고마리.

그런 임이네에게 날벼락 같은 일이 생깁니다. 남편 칠성이가 김평산의 꾐에 빠져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 살인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당한 것입니다. 창졸간에 살인자의 아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마을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 셋을 데리고 험한 일을 겪은 임이네는 몇 년 후 돌아와 용이의 도움으로 다시 마을에 자리를 잡습니다. 월선이가 마을을 떠난 후 실의에 빠져있던 용이와 사이에서 아이를 갖습니다. 그리고 강청댁이 호열자(콜레라)로 죽자 임이네는 용이와 같이 삽니다. 작가는 이즈음 임이네를 다시 ‘물가의 잡초’를 동원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 집에서 한 이부자리 속에 지낸 것도 벌써 사 년이 지나갔다. 칡넝쿨같이 줄기찬 생활력과 물가의 잡풀같이 무성한 생명력을 지닌 임이네, 식욕과 물욕과 성욕이 터질 듯 팽팽한 살가죽에 넘쳐흐르듯 왕성한 임이네는 대지에 깊이 뿌리박은 여자, 풍요한 생산(生産)의 터전이라고나 할까. (중략) 그러나 용이는 홍이를 얻은 뒤 다시 자식을 바라지 않았다.>

서희 일행과 함께 간도 용정으로 갈 때 용이는 월선이와 임이네를 함께 데리고 갑니다. 월선이 작은 아버지 공노인의 도움을 받아 국밥집을 차리자 임이네는 식당 일을 돕습니다. 그 전까지는 임이네 언행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동정할 측면이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탐욕과 악의 화신입니다. 읽다보면 작가가 자신이 창조한 임이네를 정말 미워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대목이 한둘이 아닙니다.

우선 임이네는 식당 수입 중 상당부분을 빼돌립니다. 빼돌린 돈으로 이자놀이를 하며 재산을 불리는데 혈안입니다. 임이네는 손님이 오면서 사오는 고기나 곡식도 감추고 몰래 자기만 먹습니다. 다시 진주로 돌아와서도 임이네 악행은 끊이지 않습니다. 아들 홍이가 아버지 약값으로 쓰려한 돈도 빼돌립니다. 그러다 쉰다섯에 복막염에 걸려 죽음을 예감하고 광태를 부리다 용이보다 먼저 세상을 뜹니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이 다한 것입니다.

◇고마리, 수질 정화하는 고마운 식물

작가는 임이네를 ‘물가의 잡초’라고만 표현했습니다. 물가의 잡초 중에서 어떤 잡초가 임이네에 가장 잘 어울릴까요. 소설을 읽으면서 고마리가 떠올랐습니다. 고마리는 생명력이 왕성한 물가의 잡초이면서 꽃이 피면 상당히 예쁜 식물입니다. 작가가 물가의 잡초, 그러니까 수생식물에 대해 더 잘 알았으면 고마리라고 특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마리는 손가락 정도의 길이인데, 잎의 모양이 로마 방패 모양으로 아주 개성 있어서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마리를 보거나 만질 때 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며느리밑씻개처럼 고마리에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줄기에 긁히면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점도 한 성깔 있는 임이네와 닮은 것 같습니다. 고마리는 한해살이풀이지만 계속 같은 자리에서 나는 것은 뿌리의 폐쇄화(꽃잎을 열지 않고 자가수정해 씨앗을 만드는 꽃)로도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고마리는 제 욕심만 채우는 임이네와 달리, 다른 식물과 세상을 위해 수질을 정화해주는 고마운 식물입니다. 오염된 축산폐수를 고마리가 살고 있는 수로를 거치도록 했더니 1 급수가 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마리와 함께 수질을 정화하는 식물로 여뀌와 부레옥잠 등이 있습니다. 수질 정화 기능으로 물을 깨끗하게 하고, 예쁜 꽃으로 우리 눈까지 정화하는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마리라는 독특한 이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마리가 수질 정화 효과가 커서 ‘고마우리 고마우리’ 하다가 고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마리가 물가에서 워낙 무성하게 퍼져 나가니 이제 그만 되었다고 ‘그만이풀’이라고 하던 것이 고마니를 거쳐 고마리가 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둘 다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이름 유래입니다. 이처럼 유래를 짐작하기 어려운 우리 식물 이름이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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