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식있게 청혼-금전거래”… 173가지 편지 매뉴얼, 자기계발서로[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2024. 8. 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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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의 책, ‘특별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
직원 추천-금전 독촉 등 내용 방대
편지 주고받는 문화 발전하며… 예절-격식 갖춘 서한 규범 인기
18세기 영국에서 서신 교환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사회적 상승을 꿈꾸던 사람들 사이에 격식 있는 편지쓰기 매뉴얼이 큰 인기를 끌게 됐다. 편지쓰기를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린 영국 화가 윌리엄 프리스의 유화 ‘편지’. 사진 출처 langmann.com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편지쓰기 교본 ‘서간문범’의 등장

“네 아내가 그처럼 엄청나게 소중하고 사랑스럽다면 너 혼자 간직할 것이지 왜 끝도 없이 그 얘기를 떠들어대고 남의 관심을 요구하며 성가시게 하는 것이냐.” 팔불출 동생을 꾸짖는 견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예의 바른 편지쓰기는 서양 매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를 위해 서간문범(書簡文範, letter-writing manuals)이라고 불리는 편지쓰기 교본이 나타났다.》

서간문범은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16세기 초에 등장한 장르인데, 영국에서는 특히 18세기에 크게 유행하게 된다. 서간문범의 인기는 우편 시스템의 발달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1685년 영국 정부는 낮은 사회계층까지도 이용 가능한 획기적인 우편제도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신문과 잡지의 배포가 활발해졌고 서신을 이용한 개인의 커뮤니케이션도 폭증했다. 이런 변화는 읽고 쓰는 관행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만들었고, 그 영향으로 18세기 영국의 언어 사용이 엄청나게 세련돼 갔다.

서신 교환이 보편적인 사회에서는 편지가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일종의 증명서 역할을 한다. 사회적 상승을 꿈꾸던 사람들은 좀 더 근사한 편지를 쓰기를 원하기 마련이어서 그런 욕망에 부응하던 편지쓰기 매뉴얼은 큰 인기를 끌게 됐다. 서간문범은 올바른 문법이나 글쓰기 기술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계발서와 흡사하게 사고와 행동의 지침을 제공했다.

영국 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이 펴낸 ‘특별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 책의 표지. 사진 출처 slideplayer.com
18세기 영국의 서간문범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소설가 새뮤얼 리처드슨(1689∼1761)이 1741년에 펴낸 ‘특별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Letters Written to and for Particular Friends)’다. 총 173개의 모범 서한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청혼이나 구애를 위한 연애편지, 금전 문제를 둘러싼 독촉장, 회사 직원이나 가내 하인용 추천장, 연락이 뜸한 가족을 닦달하는 내용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담고 있다. 금전이나 사업에 관련된 편지는 비교적 짧지만, 감정이 개입된 인간관계를 다룬 편지는 상당히 길다. 그런 편지들 대부분은 상황을 설명하는 동시에 조언을 주고받으며, 그 과정에서 모범적 행동의 모델이 도출되는 식이었다.

‘특별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는 그 자체가 훌륭한 사료(史料)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영국의 사회상을 밀도 있게 전해주는 텍스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당시 영국에서 상인, 상업활동과 물질주의가 누리던 존재감이다. 성공에 조급한 젊은 상인에게 근면과 경영을 먼저 배우라는 조언이며 해외 교역 종사자의 애국심과 자부심, 도매업자가 법률가보다 낫다는 시각, 거래상과의 치열한 대금 협상 과정 등 영국 상업화의 다채로운 면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돈을 빌리는 일은 일상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특별한 친구에게 쓰는 편지’도 채권 채무에 관련된 다양한 편지 견본을 싣고 있다. 흔쾌히 돈을 빌려주겠다는 편지, 빌려주면서도 “못 갚을 것 같으면 이 돈을 바로 돌려보내라”라며 날짜를 제시하거나, 제때 갚지 못한 경우 사정을 설명하며 선처를 구하는 내용, 혹은 빌려준다고 약속해 놓고 돈을 안 빌려주는 상대방에게 빨리 돈을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하는 편지의 모델도 있다.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편지는 아래와 같이 세 종류를 수록했다.

“편지 116: 귀하의 요청이 하필 제 개인 사정이 원활치 않을 때 도착하는 바람에 응하지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 117: 급박한 상황이 생겨 열흘 전에 저 자신도 돈을 빌려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러하니, 귀하의 요청에 응하지 못함에 대해 제 의지보다는 제 능력 부족을 탓해주시기 바랍니다.”

“편지 118: 귀하의 대부 요청에 관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드러내야만 하는 일은 제게는 고통스럽습니다. 현재 저는 무조건 날짜를 맞춰야 하는 필수적인 일 때문에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제 충심을 보여드릴 수 없어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대한 거절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춘 문장들이다. 그런데 이런 예절과 격식은 서간문범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제였다. 이를 두고 클레어 브렌트라는 학자는 서간문범이라는 장르가 실생활에서의 편지작법을 얼마나 발전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화법이나 예의 바른 커뮤니케이션에는 분명히 큰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리처드슨 역시 자신의 책이 편지쓰기의 규칙을 가르치기보다 오히려 “마음을 치유하고 이해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물질주의와 상업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영국이 도덕적으로 퇴행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혼돈과 퇴행을 극복할 유일한 방법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어떤 경제적 상황에 놓여있든지 간에 상대방을 존중하는 예의 바른 편지는 그런 희망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이었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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