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종목 99% 하락, 시총 192조 증발...올 상승분 다 날아갔다
미국발(發) 경기 침체 공포가 주말을 거치는 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나 5일 아시아 증시를 덮쳤다. 한국·일본·대만 증시가 이날 동시에 역대 최대 하락 폭을 기록, 최악의 ‘블랙 먼데이’를 보냈다.
한국 코스피는 전장 대비 234.64포인트(8.77%) 하락한 2441.55에 마감했다. 하루 코스피 하락 폭이 200포인트를 넘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코스피는 올해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고 연중 최저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도 이날 하루에만 192조원가량 줄어들면서 2000조원 밑으로 떨어졌다.
아시아 증시 중 일본의 낙폭이 가장 컸다. 일본 닛케이평균은 12.4% 폭락했다. 이날 닛케이평균 하락 폭(4451엔)은 지난 1987년 10월 19일 미국의 블랙 먼데이 다음 날 일본 증시의 하락 폭(3836엔)을 뛰어넘었다. 대만 가권지수는 8.35% 떨어졌다. 가권지수 하락 폭도 1807포인트로, 지난 2일(1004포인트) 세운 최대 하락 폭 기록을 단 1거래일 만에 갈아치웠다.
아시아 증시 급락은 미국 실업률 상승, 제조업 경기 전망 악화, AI(인공지능) 버블론 대두 등 미국 경기 침체 신호가 동시에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침체가 대미 수출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주요 국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지정학적 불안도 악재다. 이날 미국 매체 악시오스가 “이란의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 공격이 임박했다”고 보도한 것이 불안감을 키웠다. 앞서 이스라엘이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하마스 지도자를 암살하자, 이란 최고 지도자가 이스라엘 공격을 명령한 상태다.
아시아 증시의 ‘블랙 먼데이’는 글로벌 투매(selloff)로 이어졌다. 이어 개장한 뉴욕 증시에서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지수는 6% 넘게 하락 출발했고, 다우평균과 S&P500도 3% 안팎 마이너스로 장을 시작했다.
정부는 6일 오전7시30분 최상목 경제부총리 주재로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 참여하는 긴급 거시경제금융 현안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날 아시아 증시를 짓누른 것은 투자자들의 공포(패닉) 그 자체였다. 코스피는 전거래일보다 2.5% 하락한 2611.30으로 출발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락 폭이 커져 장중 한때 10% 넘게 하락했다. 이날 오전 11시 프로그램 매매 거래를 5분간 중단하는 ‘사이드카’가 발동됐지만 매도세를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후 2시 14분쯤에는 코스피 하락률이 8%를 넘어 거래가 20분 동안 중단되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코로나 사태 초반인 2020년 3월 이후 4년 5개월 만에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된 것이다. 하지만 거래 재개 직후 코스피는 전장보다 11% 가까이 추락하며 2400선을 내줬다가, 가까스로 2400선을 회복했다. 코스닥지수도 이날 전장 대비 88.05포인트(11.3%) 하락한 691.28에 마감했다.
거래가 중단됐다 재개되면 패닉이 진정돼왔던 과거 경험과 달리, 이날은 거래 재개 후 하락 폭이 더 커졌다. 지난 2일에 코스피가 3.65% 하락한 데 이어, 이날도 장중 하락 폭이 7%에 가까워오자 프로그램 매도 물량이 쏟아져 하락세를 더 부채질했다고 시장 관계자들은 설명한다. 통상 기관 투자자들은 펀드 하락률이 10%를 넘으면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손해를 보고 파는 손절매를 내부 규정으로 두고 있다. 시장 관계자는 “손절매 물량이 연쇄적으로 쏟아져 주가 하락 폭을 키웠다”며 “투매가 투매를 부른 것”이라고 했다.
이날 코스피 상장사 957개 중 12개를 제외한 모든 상장사 주가가 떨어졌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코스피에서만 1조5000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하며 폭락세를 주도했다. 지난 2일에 8000억원 정도의 물량을 내던진 외인은 이날 2배가량의 국내 주식을 팔아치웠다. 외국인 매도는 반도체 관련 종목에 집중됐다. 시총 1위 삼성전자는 10.3% 내린 7만1400원에 거래를 마쳤다. SK하이닉스도 9.87% 하락하며, 연초 이후 상승분을 대부분 내줬다.
◇”일본 증시는 떨어지는 칼날”
이날 일본 증시에서도 닛케이 선물거래를 일시 중단하는 서킷브레이커가 오후에 2차례 발동됐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한 글로벌 연금펀드의 일본 책임자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일본 주식시장은 세계 무역의 바로미터”라며 “미국의 경기 침체와 지정학적 불안감이 고조돼 무역 경색이 우려되고 있기 때문에, 올해 들어 지금껏 수익성이 좋았던 일본 시장에서 돈을 빼서 일단 수익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미쓰비시(-15.5%), 미쓰이(-19.7%), 스미토모(-19%), 마루베니(-18.5%) 등 대형 무역 회사들의 주가는 모두 10% 넘게 하락했다.
6월 말까지만 해도 1달러당 160엔이었던 엔화 약세가 최근 142엔가량의 강세로 전환했기 때문에 일본 수출 기업들의 실적이 나빠질 것이란 우려도 투매의 한 요인으로 지목된다. UBS의 지역투자책임자인 켈빈 테이는 CNBC에 “지금 일본 증시에 진입하는 것은 떨어지는 칼날을 잡는 것”이라며 “지난 2년 동안 일본 증시가 강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엔화가 매우 매우 쌌기 때문이며, 그게 지금 투자자들이 빠져나가고 있는 이유”라고 했다.
올해 상승률이 36%를 넘었던 대만 가권지수도 폭락을 피하지 못했다. 대만 증시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반도체업체 TSMC는 9.8% 떨어지며 역대 최대 하락률 기록을 세웠다. 블룸버그는 “대만 증시가 미국 경제 침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촉발된 매도세의 직격탄을 맞았다”고 했다.
◇”시장의 문법이 하루 새 바뀌었다”
주식뿐 아니라 원자재나 채권 시장도 미국 침체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석유 선물 가격은 6월 초 이후 2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자들이 “성장 둔화로 원유 수요가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전 자산에 대한 선호가 반영돼 미국 국채 10년물 수익률은 코로나 이후 가장 큰 일주일 하락률을 기록하고 있다. 월스리트저널은 “성장 둔화 우려로 대형 기술주 상승이나 일본 엔화 하락 등 올해 가장 인기 있었던 거래에 올인한 헤지펀드들이 발을 빼고 있다”고 했다. 아폴로의 수석 경제학자 토르스텐 슬록은 파이낸셜타임스에 “시장 문법이 문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고 했다.
정부는 이날 오전 8시 국내외 금융시장 동향 점검 콘퍼런스콜을 연 데 이어, 장 마감 후 오후 4시 30분에 주식시장 변동성 관련 긴급 시장 점검 회의를 열었다. 정부 관계자는 회의 후 “실물경제와 금융시장 여건에 비해 낙폭이 과도한 측면이 있다”며 “과도한 불안 심리 확산이나 쏠림 현상 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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