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아무도 장기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 사회를 위협하는 장기적 문제가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기후, 인구다
내가 청년층을 중시한 이유는, 그들이 미래 인구구조의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출생률을 높여 인구구조의 악화를 저지할 주체라는 이유에서다
요컨대 사회운동 아닌 컨설팅을 한 셈이다. 컨설팅도 사회운동 못잖게 관점의 전환을 제안한다. 그러지 않고선 위기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학교’를 개혁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기 쉽다. 특히 공립학교는 고도로 불안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전보 주기가 5년이다. 즉 학교의 교사진은 매년 평균 20%씩 교체된다. 교장 임기는 4년이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평균 33개월이 되면 떠난다. 교사와 교장이 비상한 노력을 통해 의미 있는 교육적 전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해도, 3년만 지나면 첫해 구성원의 절반도 남지 않으며 교장도 바뀐다. 5년이 지나면 아무도 안 남는다. 연간 퇴사율이 20%나 되는 회사가 장기적으로 역량을 축적하고 발전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이러한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외면한 채 학교개혁을 성공시키려는 모든 담론들에 대해 나는 불편함을 느낀다. 혁신학교든 IB학교든 마찬가지다. 그들은 교사를 언제 갈아끼워도 동일하게 작동 가능한 기계부품처럼 여기는 패러다임을 부지불식간에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립학교 교사들이 겪는 일은 한국의 공무원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경험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많은 공무원들이 2년에 한 번씩 근무처를 옮긴다. 이른바 순환보직이다. ‘공평성’과 ‘부패방지’를 명분 삼아 전 세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을 만나보면, 각 산업 영역별로 남아 있던 터줏대감 공무원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퇴임해서 이제 과거의 경험과 노하우를 실감나게 전수해줄 사람이 남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기간 숙성된 전문가가 없는 것이다. 외교관을 만나보면, 한 지역에서 장기간 근무하면서 전문성을 닦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선호지역인 미국이나 유럽에서 몇년 동안 근무하고 나면 다음엔 무조건 아프리카와 같은 비선호지역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장기적 문제’ 고민 집단 거의 없어
민간 영역에도 유동성과 불안정성이 두드러진다. 한국인들은 직장을 자주 바꾼다. OECD에서 이직률이 가장 높다. 한 회사에서 일하는 평균 근속연수가 5.9년으로 가장 짧다.(2019년) 한국은 제도적으로 해고하기 어려운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제도는 일부 상층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또 한국인들은 이사를 자주 다니고 사는 지역을 쉽게 바꾼다. 행정구역 밖으로의 이사율이 OECD에서 가장 높고, 한집에서 거주하는 기간이 평균 7년9개월로 가장 짧은 것으로 추정된다.(2022년)
한국의 정치 또한 장기(長期)를 생각하기 어렵게끔 불안정이 구조화되어 있다. 대통령은 5년 단임으로서 주요 국가들 가운데 재임 가능한 기간이 가장 짧다. 집권하고서 부랴부랴 무슨 계획을 세워도 기껏해야 3~4년짜리다. 급조한 계획이 제대로 다듬어졌을 리도 없다. 물론 이를 보완할 방법이 있다. 바로 정당이 장기적 비전과 정책을 갖추면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당들의 당대표 임기는 2년이고, 원내대표 임기는 고작 1년에 불과하다. 연임은 하지 않는 게 관례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장기적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집단은 거의 남지 않은 듯하다.
내가 윤석열 정부의 정책 가운데 가장 분노했던 일은 연구·개발(R&D) 예산의 일괄 삭감이었다. 이는 한국이 ‘장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를 결정적으로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OECD가 제공하는 그래프를 보면 2000년 이후 연구·개발비 증가율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라가 한국과 이스라엘이다. 이것이 한국이 21세기 들어 선진국 대열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카르텔 운운하면서 연구·개발 예산을 일괄 삭감함에 따라, 기초과학 실험실부터 시작하여 차세대 전투기 엔진 소재개발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서 참담한 공백과 지체가 벌어지고 있다. 황급히 내년에 예산을 복원한다고 하지만 그 기간을 버틸 수 없는 연구인력은 이미 이직하거나 타국으로 떠나고 있다. 추락한 신뢰는 장기적일 것이고 유·무형의 손해는 천문학적일 것이다.
장기적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나에겐 오래된 습관이다. 나는 한국사회를 위협하는 장기적 문제가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 기후, 인구다. 내가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줄이기 위해 미국의 협력이 필수적임을 이해한 것이 1990년대 초반이다. 내가 기후 위기를 내다보며 ‘환경적 한계 개념의 형성과 변화’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고 했던 것이 1990년대 후반이다. 내가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구조의 변화가 한국사회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들 위협임을 이해한 것이 2010년 무렵이다. 2012년에 저서의 한 장(章)을 이 주제에 할애하고 2015년에는 ‘청년이 최우선이다, 불쌍해서가 아니다’라는 칼럼을 썼다. 청년층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식의 ‘감성적’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미래 인구구조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출생률을 높여 인구구조의 추가 악화를 저지할 수 있는 주체라는 ‘논리적’ 이유에서다. 요컨대 나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컨설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컨설팅도 사회운동 못지않게 종종 ‘관점의 전환’을 제안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위기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에는 미래지향성이 내포
나는 한국의 진보 정책 생태계가 ‘후기 노무현 시대’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레미 리프킨의 책 <유러피언 드림>은 고 노무현 대통령이 “반농담으로 그냥 이 책을 베끼면 좋겠다는 얘기도 하실 정도”였다고 한다.(김성환 의원의 회고) ‘후기 노무현 시대’는 노 대통령의 유훈과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지해온 정치인 및 연구자들이 이끌어간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미래 인구 구조의 변화를 계산하며 치열하게 유러피언 드림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물론 이상은 아름답고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실현을 통해 불이익을 볼 집단이 미래 세대라면, 그 이상이 무엇이든간에 이를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진보(進步)라는 말 자체가 이미 앞으로 나아감, 즉 미래지향성을 내포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 이 지면에 ‘국민연금 개혁, 진보의 평등 개념을 혁신해야’(5월28일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것은 유원중·원종현·김우창 3인의 공저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를 접한 반가움 때문이다. 후속세대에 ‘덤터기’를 씌우지 않으면서도 국민연금 본연의 기능인 노후보장성을 높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법이다. 핵심 대책은 GDP의 1%에 해당하는 20조원가량을 매년 국민연금 기금에 추가 적립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제적 정부 재정 투입’에 몇 가지 보완책을 더하면 기금은 영구적으로 고갈되지 않으며, 후속세대가 덤터기 쓸 일은 원천적으로 예방된다.
여기에 대하여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국민연금, 부작용 없는 완벽한 근본적 대책은 없다’라는 제목의 반론을 기고를 통해 제기했다.(7월1일자 경향신문) 그런데 그는 나의 논지를 왜곡하고 있다. 나는 기존의 국민연금 개혁안인 1, 2안과 별도의 3안(‘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의 방안)을 제시하며 지지를 호소한 것이 아니다. 3안은 애초에 1안이나 2안과 ‘경합’하는 안이 아니라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기존의 안들에 ‘추가’로 덧붙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3안의 핵심 아이디어는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의 싸움에 ‘무슨 소리냐, 볶음밥이 최고’라고 나서는 게 아니라 ‘뭐든 빨리 선택한 뒤 탕수육을 추가하자’는 것이다. 나는 이미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가 제시하는 개혁안은 1안이든 2안이든 절충안이든 결정되고 나면 즉시 후속 내용을 덧붙임으로써 추진할 수 있다”라고 썼다.
또한 이상민 위원은 3안의 가치를 폄하하며 “전 세계 어느 나라도 GDP의 190%에 달하는 기금을 조성하고 그 기금을 통해 국가재정을 해결하지 않는다”고 썼다. 하지만 노르웨이 연기금은 이미 GDP의 250%에 달한다. 그는 “현 국민연금 기금 규모 1000조원은 우리나라 GDP의 약 50%에 육박한다. ‘연못 속의 고래’라고 불린다. 이를 190%까지 늘리면 ‘연못 속의 고질라’가 된다”고 썼지만, 좁은 한국의 자산시장에 갇혀 있을 때에만 고래나 고질라가 되는 것이지 드넓은 글로벌 자산시장에 나가면 잉어나 메기가 되는 셈이다. 무엇보다 그는 현 정부예산의 3%에 해당하는 20조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것을 당연한 전제처럼 이야기했는데, 미래 세대의 권리를 위해 ‘증세’라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혀 기이한 느낌을 준다. 이런 태도를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앞선다.
■이범
서울대 학부에서 생물학, 대학원에서 과학사·과학철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 수료 후 수능 과학탐구 강사가 돼 ‘메가스터디’ 창업에 참여했다. 2003년 ‘일타강사’ 시절에 은퇴한 드문 기록을 갖고 있다. 이후 교육평론가, 정책전문가로 변신했다. 서울시교육청 정책보좌관, 민주연구원 부원장, 한겨레신문·시사인·허핑턴포스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현재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지난 40년간의 한국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다. 저서로 <문재인 이후의 교육> 등이 있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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