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아내의 인연 끝내더라도 아이들 아빠·엄마는 지켜주세요”

박용필 기자 2024. 8. 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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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을 주례’하는 판사…대구가정법원 경주지원 정현숙 부장판사의 당부
정현숙 부장판사가 지난 1일 대구가정법원 경주지원 조정실에서 “이혼을 하더라도 상대 배우자의 면접교섭권을 보장하고 양육비 지원 약속을 철저히 이행해야 자녀의 미래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본인보다 자녀
복수와 돈에 집착하면 영혼 다쳐
배우자의 면접교섭권 보장하고
양육비 지원 약속 꼭 이행해야

“이건 절대 아빠한텐 비밀로 해주세요. 사실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요. 어젯밤 꿈에서도 만났어요. 그렇지만 나마저 엄마와 살겠다고 하면 아빠가 너무 불쌍하고 힘들어할 테니까 아빠랑 살게요.”

정현숙 대구가정법원 경주지원 부장판사(49)는 2017년부터 올 초까지 부산가정법원에서 가사사건전문법관을 지냈다. 지난 1일 그에게 ‘이혼 시 주의할 점’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한 ‘열람 제한(재판장만 볼 수 있는) 보고서’의 문구를 들려줬다. “이 아이는 아빠가 제출한 증거 영상에선 ‘다른 남자가 좋다고 떠난 엄마 보고 싶지 않다’고 증언했어요. 그러나 아빠가 볼 수 없는 보고서에 담긴 속마음은 달랐죠. 가장 주의해야 할 건 ‘자녀들의 영혼’이에요.”

정 판사는 최근 책을 냈다. <오늘도 이혼주례를 했습니다>이다. ‘이혼주례’는 가정법원에서 협의이혼 기일에 재판장이 당사자들의 이혼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를 뜻한다. 책에는 그가 주례를 맡았던 ‘이혼식’들이 담겼다. “이혼이 금기가 아닌 시대죠. 실제로 이혼 건수도 늘고 있어요. 거기서 가장 큰 피해자는 당사자들이 아닌 자녀들이에요. 저 또한 엄마라 그냥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그가 책에 소개한 이혼의 과정은 처절하다 못해 참담하다. 자녀에게 ‘엄마가 싫다’는 증언을 반강요하고 이를 촬영까지 하는 아빠, 외도를 한 아내가 이혼 소송 중 자신을 부도덕한 사업가로까지 매도하자 배신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의 사연도 있다.

실제로 다른 민형사 소송에 비해 이혼 소송은 진흙탕 싸움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기여도’에 따라 분배 기준이 명확한 ‘재산 분할’ 대신, 유책성(이혼의 원인이 된 잘못)에 따라 금액이 바뀌는 ‘위자료’가 주된 쟁점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잘못을 밑바닥까지 들춰내다 못해 모략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상대는 ‘한때 남편 또는 아내였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라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요. 서운함이 배신감으로, 배신감이 복수심으로 이어지게 돼요.”

‘복수’와 ‘돈’에 집착하게 되면 ‘자녀’를 잃는다고 했다. “배우자의 부정이 적나라하게 담긴 판결문을 자녀에게 보여주거나, 상대 배우자가 자녀를 만나러 오는 ‘면접 교섭’을 노골적으로 막는 경우도 많아요. ‘상대 벌주기’에 자녀를 이용하는 셈인데,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자녀의 영혼이 죽어가는 건 보지 못하는 거죠.”

그는 이혼 가정 자녀들이 꼭 비행 청소년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마 또는 아빠 한쪽과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경우엔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자녀는 (면접 교섭을 거부당한) 엄마 또는 아빠가 정말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게 돼요. 배신감에 휩싸이죠. 그 상태에서 양육친(양육권을 얻어 자녀를 키우는 배우자)과 갈등을 빚게 되면 가출을 하곤 합니다. 하소연할 다른 한쪽의 부모가 없으니 이른바 ‘가출팸’에 의지해요. 성매매 등 범죄에 노출되는 경위 중 상당수가 이런 식이에요.”

그는 ‘남남’, 심지어 ‘원수’가 되더라도, 자녀에게서 ‘엄마’나 ‘아빠’를 빼앗아선 안 된다고 얘기한다. 자녀를 위해서라도 이혼이라는 선택 자체도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만 자식 때문에 ‘무조건 그 집 귀신이 되라는 얘기’는 아니라고 했다. “생명과 신체의 안전을 위협하는 폭행이나, 가정 경제에 중대한 타격을 줘 가정의 존립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사치나 도박 등의 경우, 피해 배우자에게 ‘참고 살라’는 건 ‘서서히 죽어가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자녀 역시 부모의 폭력을 보고 자라거나, 경제적 궁핍으로 생존에 위협을 받는 가정에서 자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점들이 모여 선이 되는 경우 돌이키기 어렵다”고도 했다. “하나의 사건 때문에 이혼하진 않아요. 사건들, 즉 점이 반복되고 촘촘해져 선이 되는 경우 이혼 법정에 오게 돼요. 일단 법정까지 온 이상 재결합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남은 건 ‘얼마나 점잖게 헤어지느냐’ 정도죠.”

그래서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선이 굵어지기 전에 점이 더는 촘촘해지지 않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남편 또는 아내에게 내가 하는 행동과 말, 이걸 내 자녀가 미래의 배우자로부터 당한다고 한번 생각해보세요. 저희 부부에겐 이 방법이 효과가 있었어요.”

글·사진 |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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