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 4류 정치의 나라에 사는 1류 스포츠인들

강필희 기자 2024. 8. 5. 19: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고 성적 양궁이 주는 감동, 공정경쟁 시스템이 밑거름
현실에선 반칙이 ‘뉴노멀’로…진흙탕 언제까지 봐야 하나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특파원들을 상대로 “한국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한 게 1995년 4월이었다. 그는 이 발언으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곤욕을 치렀지만 시중 여론은 “할 말을 한 것”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한 세대가 지났다. 이 회장의 안목으로도 당시엔 내세울 1류가 없었지만 지금 한국엔 세계인이 인정하는 최고가 꽤 있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분야에서 글로벌 톱 클래스에 드는 굴지의 기업들이 있고 클래식과 대중음악, 영화와 드라마를 망라하는 한류가 전세계를 휘감고 있다.

중반을 넘어선 파리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은 또 어떤가. 뛰어난 실력 못지 않게 밝고 긍정적이고 힙한 매력으로 올림피언들과 관중, 세계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잘 생긴 남자는 한국에 다 모였다.”(펜싱 오상욱) “세상에서 가장 쿨한 여전사.”(사격 김예지) 머스크를 비롯한 셀럽과 네티즌들의 반응은 우리 어깨까지 우쭐하게 한다. 산업 문화 스포츠 등 여러 부문에서 모방자에서 선도자로, 기준을 따르는 국가에서 기준을 만드는 국가로 바뀐 게 바로 한국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눈을 국내로 돌리는 순간 4류도 과분할 지경의 참담한 정치판과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선진국으로 올라오면서 덜어냈던 불공정 몰염치 부도덕 위선 뻔뻔함 같은 하수 찌꺼기가 정치의 장에서는 아직도 썩고 문드러지고 있다.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우승한 전훈영이 “덜 알려진 나에 대해 사람들이 걱정한 건 당연하지만 선발전에서 내가 뽑혀 버린 걸 어떡하느냐”고 했을 때 뭉클한 이가 많았을 것이다. 10연패 위업을 달성한 여자 양궁 단체전 성과의 이면에는 직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조차 무사 통과하지 못하는 철저한 실력 위주 선발 시스템이 있었다. 아무리 세계 대회 경험이 많아도 별도의 어드밴티지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중요한 건 이름이나 나이가 아니라 누가 가장 활을 잘 쏘느냐다. 양궁 혼성 단체전에서 임시현과 함께 금메달을 딴 김우진은 “공정한 양궁협회가 있기에 모든 선수가 부정 없이 정정당당하게 경쟁한다”고 말했다. 페어플레이의 기반을 만들어준 양궁협회,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전력투구하는 선수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최정상에 부응하는 조건은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게 공정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정치인들의 공정은 믿지 않는다. 당장 공정과 상식을 내세워 정권을 잡은 윤석열 대통령이 그렇지 않은가. 당원과 국민 투표로 뽑은 당 대표를 내쫓아 억지로 제 사람을 앉히고, 사실상 전국민이 목격하다시피 한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를 사과하는데 그토록 인색한 그다. ‘전환적 공정 성장’이 1호 대선 공약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또 어떤가. 7개 사건, 11개 혐의의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는 그는 민주당 국회의원 대부분을 친명 일색으로 바꿨다. 여기엔 대장동 사건 등에서 자신을 대리한 변호사도 5명이나 들어 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겠다’는 건 좋은 말이지만 핵심은 누가 그 정의를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한국 양궁의 놀라운 성취는 협회장이나 협회 수뇌부가 규칙을 임의로 재단하지 않고 그들이 먼저 지켰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의 힘(power of justice)’이 아닌 ‘힘의 정의(justice of power)’가 설쳐대 제멋대로 공정을 운위하고, 규칙을 파괴하고, 상식을 무너뜨리고, 염치를 내팽개치면 아수라장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규범이 사라진 싸움은 어떤 식이든 개싸움이 되고 만다.

22대 국회 개원 두 달 동안 쏟아진 특검법은 무려 10건, 탄핵소추안은 7건이다. 본회의를 통과한 7개 법안 중 1개는 이미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됐고 나머지도 거부권 행사가 예고되어 있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이 단 한 건도 없는 국회에 벌써 세금 1200억여 원이 들어갔다. 이 진흙탕 싸움이 앞으로도 계속될 게 뻔한 건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가 ‘뉴 노멀’(기준)이고 정의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국민이 보이겠는가.


정치는 생각보다 국민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정치를 폄훼하고 살 수는 있지만 부정하고 살 수는 없다. 문제는 이렇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진 정치가 정상적인 사회 규범을 삼키는 블랙홀이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가 4류라 불리던 시절, 이른바 ‘3김 시대’에도 고달픈 국민에게 의지가 되어주던 정치인이 있었고, 그런 정치도 있었다. 제자리에서 발버둥쳐도 4류에 머물텐데 오히려 명확하게 퇴보해버린 한국 정치, 이 가공할 역진이 우리를 아연케 한다. 우리는 언제쯤 지친 상대를 일으키고, 석연찮은 판정에도 깨끗하게 승복하고, 그런 밑거름 위에 참신한 얼굴이 등장하는 모습을 정치 세계에서 보게 될까.

강필희 논설위원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