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에서 찾아낸 유물이야기] <111> 이덕성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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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상화에서 천연두 자국이나 기미 주근깨 반점 사마귀 같은 피부 특징은 물론 눈꺼풀이나 한 올 수염까지 그렇게 정밀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터럭 한 올이라도 같아야' 한다는 조선의 초상화 정신은 오늘날 스마트폰 어플과 '뽀샵'에 익숙해져 보이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울림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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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 이는 조선 시대 초상화를 그리는 원칙이며,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영웅시하지 않고 똑같이 그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초상화에서 천연두 자국이나 기미 주근깨 반점 사마귀 같은 피부 특징은 물론 눈꺼풀이나 한 올 수염까지 그렇게 정밀할 수가 없을 정도로 그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왜 이렇게 극사실주의 초상화를 그렸을까? 옛사람은 초상화라는 것이 인물 외형만 자세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인품 등 내면 정신세계까지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전신사조(傳神寫照)라고 한다. 즉 성품을 전달하는 것으로 여겼기에 초상화를 제작하는 과정부터 사후 관리까지 모두 그 인물을 직접 모시는 것처럼 정중하게 대하였다.
부산박물관에는 여러 점의 초상화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보물로 지정된 이덕성 초상(사진)이 대표적이다.
초상화 오른쪽 윗부분에 적힌 내용을 보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이덕성 어른의 초상으로 호는 반곡이다. 을미년에 태어나 갑신년에 돌아가셨다. 42세 때 초상이다’. 초상화 속 모습은 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의자에 앉아 있다. 얼굴은 가는 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나타내고 붉은색을 살짝 더해 명암을 드러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화가는 서양의 화법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기다란 수염은 성기면서 구불거리게 표현했고, 수두로 얽은 자국이 턱을 중심으로 코와 뺨에 나타나 있다. 코는 살짝 매부리코이며, 커다란 눈매와 꼭 다문 입매에서는 부드럽지만 강직한 그의 성품이 드러난다.
이덕성(1655~170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다. 가문 대대로 문장과 글씨를 잘 써 육진팔광(六眞八匡)으로 불렸는데, 당대 최고 글씨로 평가받는 이광사와 문장이 뛰어났던 이광려도 여기 포함된다. 이덕성은 동래부사와 해주목사, 황해도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냈으며 저서로 ‘반곡집’이 있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시정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다 좌천되기도 했으며, 동래부사가 되어서는 상인들의 밀매 행위와 왜인의 불법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그의 살아생전 행적과 초상화에 나타난 강직한 표정을 볼 때 전신사조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것 같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터럭 한 올이라도 같아야’ 한다는 조선의 초상화 정신은 오늘날 스마트폰 어플과 ’뽀샵‘에 익숙해져 보이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울림을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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