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와 야만 사이 ‘죽음의 공포’ 5년…혼혈 고아, 살기 위해 미국행 택했다

신심범 기자 2024. 8. 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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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수용 디아스포라 <6> 생존 복불복-해외입양


- 미 부사관 출신 데이비드 헐 씨
- 계부 구박에 고아원 맡겨졌다가
- 포항 양육원·영화숙 거쳐 입양
- “군대보다 더 했던 집단수용소
- 떠나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 시설들,해외구호단체와 결속
- 단속아동 대가 받고 입양 보내
- 전쟁 수습되며 후원 줄어들자
- 국가가 나서 입양장려책 펼쳐
- 피해자들, 타지서 고초 겪기도

<사진설명: 혼혈이라는 유전적 정체성, 고아라는 사회적 정체성은 소년 김성주의 삶을 위협했다. 가족의 품 바깥에서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집단수용시설이란 야만 공간은 그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까지 몰아붙였다. 그의 삶은 청년 무렵 미 공군 소속 새아버지와 만나면서 비로소 안정을 얻었다. 미 육군 부사관으로 입대한 뒤로 미국 독일 한국 등에서 박격포 장갑차 운전병·해병대 기관총 교육관등으로 26년 반을 복무했다. 통신대대본부 주임 상사로 파나마 전쟁에 투입되기도 했다. 생사가 오가는 현장을 누비며 살아온 그는 “영화숙으로 인해 나는 아직도 두려움이 많고 실수하는 것을 겁내고, 잠 잘 때 무서운 악몽을 꾼다”고 한다.>

‘찬 바람이 솔솔 부는 서부전선 백령도, 오늘도 완전무장 구보를 하네(1절 전반)… 언제 봤던 웬수라고 이다지도 괴롭히나, 이제는 단잠일랑 재워 주소서(3절 후반).’

해병대 사가(私歌) ‘백령도가’의 노랫말이다. 흔히 ‘싸가’로 발음되는 사가는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비공식 군가다.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 멜로디에 사병의 고달픈 처지를 가사로 녹여 불렀다. 혹독한 훈련, 열악한 배식, ‘악으로 깡으로’ 정신 확립을 명분으로 한 가혹행위가 ‘백령도가’에 담겼다.

‘찬 바람이 솔솔 부는 장림동의 영화숙 , 오늘도 아침부터 빠따를 맞네. 언제 지은 원수라고 이렇게도 때립니까, 제발 밤잠이나 자게 해주소.’

미군 부사관 출신 데이비드 에드워드 헐(David Edward Hull·70) 씨는 미처 몰랐다. 60년여 전 부산 부랑아 수용시설 ‘영화숙’에서 불렀던 노래가 국군 해병대 사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숙에 갇힌 고아들이 자신들 처지에 빗대 만든 노래인 줄로만 알았다. “운동장에서 구보나 제식훈련 때 영화숙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든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이 노래 그대로였습니다.”

서해 최북단의 백령도는 영화숙과 약 500㎞ 거리다. 어떻게 노래가 전파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과정이 어떻게 됐든, ‘백령도가’는 두 공간에서 공명했다. 두 집단 모두 굶고, 구르고, 얻어맞고, 잠을 설쳤다. 상식을 뛰어넘는 가혹한 처사를 강요받았다. 같은 처지였다. 물론 간극도 명백했다. 해병대는 자의로 입대해 긍지를 갖고 복무하는 성인 집단이다. 반면 부랑아 집단수용시설은 고아 등이 강제로 끌려와 구성된 아동 집단이다. 국가는 부모 잃은 아동을 품어주지 않았고, 해병대에 견줄 가혹한 삶으로 아동을 내던졌다.

헐 씨는 중학생 무렵인 1968년 미국으로 입양 갔다. 집단수용시설이란 ‘야만 공간’ 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떤 가정의 양자가 될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회가 온 이상, 도박을 걸어야 했다. 평생 지옥같은 공간 근처를 떠돌 것이냐, 아니면 훌쩍 떠나 먼 나라로 향할 것이냐. 생존이 걸린 내기에서 그는 미국으로의 ‘피난’을 택했을 뿐이다.

▮‘혼혈 고아’에게 강요된 야만적 삶

헐 씨의 한국명은 김성주. 미국에서 새 가족과 인연을 맺기 전까지의 이름이다. 그는 혼혈 고아다. 생부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 생모도 어렴풋한 모습만이 기억에 남았다. 어릴 적 부산 적기(남구 우암동)에서 살았고, 갓을 쓴 양반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새아버지 구박이 심해 보다 못한 어머니가 김 씨 네다섯 살 무렵 인근의 고아원 ‘남광학원’에 그를 맡겼다는 기억만 흐릿하게 떠오른다.호적상 생일 1954년 12월 1일이 정말 자신이 태어난 날인지도 불분명하다.

또래 사이에서 그의 생김새는 유독 튀었다. ‘아이노꾸’(혼혈)라 놀림받았다. 외할아버지가 생모를 박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유전적 기원은 2016년 받은 DNA 검사로 확실히 알게 됐다. 미국 ‘23앤드미’(23andMe)사의 검사 결과 생부가 영국계라는 결론이 나왔다. 영국계 미국인이 한국에 와서 생모와 만나 자신을 낳은 것으로 김 씨는 짐작한다.

군인이 되기 전부터 김 씨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다. 고아원 형들의 학대에 밥을 제대로 먹은 날이 없었다. 무언가를 먹더라도 억지로 구토하게 했다. 심지어는 그 토사물을 다시 먹도록 했다. 구타와 성적 학대도 수시로 벌어졌다. 깡다구를 뺀다’며 산으로 끌고가 드럼통에 집어놓고 굴려버리기도 했다. 주변은 혼혈인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정신적·육체적으로 평온하지 못했다. 김 씨는 “온갖 괴롭힘에 뼈만 앙상했다. 바보 같은 모습이었다”고 회상했다.

앙상한 몰골은 전화위복이 됐다. 그 시기 고아원은 외국 아동구호단체가 후원하는 현금과 물품에 크게 의존했다. 그가 지낸 고아원도 마찬가지 사정이었다. 고아원 후원 단체 소속 선교사 등이 수시로 시설을 찾아 관리 상황 전반을 검토했다. 아동의 상태 또한 점검 대상이었다. 김 씨는 “외국 선교사 한 분이 나를 보더니 너무 야위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른 데로 가고 싶느냐’고 물었다. 나는 두 말 없이 가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국민학교 2학년 무렵 포항양육원으로 옮겨졌다.

▮집단수용시설이란 야만 공간

양육원 생활은 전에 없이 편했다. 무척 말랐던 김 씨 앞으로 후원금이 쏟아졌다. 시설은 ‘돈이 벌리는’ 그를 좋아했다. 그를 친자식처럼 돌봤다. 덕분에 김 씨 역시 점차 몸을 회복했다. 한동안 잊고 지낸 엄마를 떠올릴 여유까지 생겼다. 문득 든 엄마 생각에 그는 부산으로 갔다. 고향 적기 사람들은 대번에 그를 알아봤다. 그러나 어머니 행방만큼은 아무도 몰랐다. 낙심해 저녁 거리를 걷던 그는 방범대원 손에 이끌려 파출소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음 날이면 경찰이 엄마를 찾아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경찰은 그를 엄마 품 대신 영화숙으로 보냈다.

영화숙은 군대보다 더 했다. 외팔의 상이군인이 새벽 4시30분마다 호루라기를 불어 기상점호를 알렸다. 대열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박살’이 났다. 일과 시간엔 삽과 곡괭이로 땅을 다지는 노역에 동원됐다. 딴 짓이라도 하면 각종 가혹행위와 구타의 제물이 됐다. 소대 분위기는 고참인 소대장의 기분에 좌우됐다. 비위에 거슬리면 엄청난 보복을 당했다. 먹을 게 없어 뱀, 쥐, 개구리를 잡아먹었다. 도망하다 붙잡히면 ‘본보기’가 됐다.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때려 걷지 못하게 만들었다. ‘빠따’에 대한 두려움이 지금도 선명하다. “맞아서 병신이 되거나 심하면 죽었다. 그런 아이를 뒷산에 묻기도 했다”고 한다. 김 씨는 이 시절의 기억 때문에 심장이 약하다. 잠잘 때 자주 악몽을 꾸기도 한다.

김 씨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5년을 버텼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영화숙을 탈출해 포항양육원으로 돌아갔다. 한 때는 그를 자식처럼 대해주던 곳이었으나 당시엔 김 씨를 탐탁찮게 여겼다. 김 씨는 그간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는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6개월 정도 지나자 원장은 그에게 ‘너처럼 생긴 애들이 있는 데로 가고 싶느냐’고 물었다.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고민 없이 그렇게 해 달라고 말했다. 영화숙 같은 야만으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경기 일산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로 향했다. 당시 14살 이하의 아동만 양자로 보낼 수 있어 시설이 나이를 두 살 줄여 서류를 써줬다. 반 년간 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배운 뒤 미 공군 소속 군인 양아버지와 만나 미국 생활에 적응해갔다. 어른이 돼선 미 육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했다. 총 26년 반을 군인으로 지내다 2020년 부사관 최고 계급인 원사로 퇴직했다.

<사진설명: 1969년 재단법인 영화숙이 부산 동구 초량동 옛 인보관 건물을 부산시로부터 불하받고자 작성한 협조전. 각 구청 경찰서에서 수용 의뢰된 자를 중구 대교동 연락사무소에 두고 있으나 수용소와 거리상 불편하니 인보관 건물을 임대해 달라고 적혔다. 1968년 영연방아동구호재단도 부산시장에게 협조전을 보냈다. 거리에서 단속된 아이를 대교동에 보내는데 제반시설이 없어 거리와 다를 바 없으니 인보관을 임시아동보호소로 쓰게 해 달라고 써 있다.>

▮구호와 야만의 접경

당대 해외 구호단체는 부랑인 집단수용시설과 높은 결속력을 보였다. 일례로 1960년대 부산의 공식 부랑아 시설인 영화숙도 영연방아동구호재단의 후원으로 음식과 의복을 받았다. 영화숙 부지에 기아극복운동사업의 일환으로 모범 시범 농장이 차려지기도 했다. 이들의 후원금은 아동 개인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시설 운영비로 쓰였다. 영화숙이란 ‘거지 집’(Beggar Home)을 후원한다는 사실은 부산시에 편의나 ‘선처’를 부탁하기에 훌륭한 명분이 돼줬다. 자신들의 사업 성과를 소개할 때도 늘 영화숙 지원 내용을 주요하게 다뤘다.

재단은 단속 아동을 영화숙에 넘기는 데도 협조했다. 재단이 구호병원으로 쓰던 동구 초량동 옛 인보관 건물 1층에 100명 수용 규모의 임시아동보호소를 차려 1968년 6월부터 단속 아동을 대기시킨 것이다. 명목상 이곳은 재단이 시의 허가를 받아 운영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실상 영화숙이 운영을 도맡았다. 이듬해 시는 직접 아동보호소를 차리고 이 공간을 돌려받아 아파트건설사업소 청사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시설의 부서간 인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화숙이 이곳을 점유하곤 “시장 지시로 입주했으니 시장 지시 없이는 철수할 수 없다”고 버텼다.

두 기관이 밀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양측은 이전부터 단속 아동을 인수·인계해왔다. 당시 영화숙은 중구 대교동(현 중앙동)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단속 아동을 대기시켰다. ‘여수뱃머리’라 불린 옛 연안여객터미널 인근이다. 1968년 2월 재단이 보호소를 설립하려 할 때 시에 보낸 협조전에는 ‘가출 어린이를 거리에서 데리고 오면 대교동에 있는 조그마하고 불편한 장소로 일시 대기시킨다. 소년 소녀를 보살필 제반시설이 충분하지 않아, 환경이 거리보다 나아졌다고 느끼기 힘들다’고 적혔다. 시가 이 건물을 회수할 때 영화숙도 ‘대교동 사무소는 본원과 멀어 불편하다’며 불하를 요청했다. 두 기관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한 목소리를 내왔음을 보여준다. 해외단체 역시 현지 후원자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수백 명의 가난한 아동이 시설에서 ‘보호’ 중인 광경은 국내·외 후원자의 동정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터다.

해외 구호단체가 집단수용시설을 직접 통해 아동을 해외로 보내기도 했다. 해외 원조기관 ‘십자군연맹’은 형제복지원 전신인 형제육아원 시절부터 수용 아동의 해외 후원자 결연·해외입양을 추진해왔다. 형제복지원을 거쳐 해외로 입양간 아이의 수는 확인된 이만 21명이다.

▮수용시설·해외입양, 생존 도박

김 씨가 미국에 갈 무렵, 입양은 고아·부랑아 문제의 주요 대책이었다. 1960년대 들어 국가는 고아를 국내외 가정에 양자로 보내거나 양육을 위탁하는 사업을 장려했다. 고아를 입양하거나 위탁해 기르는 가정에 한 달에 8달러 혹은 수백 원을 지급하는 식이다. 고아원보단 가정에서 자라는 편이 건전한 아이를 키우는 방법이 될 거라고 했다.

속내는 달랐다. 건전한 양육보다는 시설의 경영 악화가 이유였다. 1960년대 전쟁 여파가 수습되면서 해외 구호기관의 사업 축소가 본격화했다. 해외단체 기부로 운영된 아동시설에겐 악재였다. 국가는 시설 지원 비용에 부담을 느꼈다. 입양 등 탈시설책으로 돈을 아끼려 했다. 입양기관이 부모 대신 절차를 밟는 대리입양제도 1961년 고아입양특례법으로 만들어졌다. 시설은 한 사람당 3000달러 정도를 받고 아동을 외국에 넘겼다. 한국의 ‘입양 디아스포라’ 아동은 1953년 이후 20만여 명에 달한다.

부작용이 컸다. 부적절한 가정에까지 아이가 보내졌다. 고아가 아닌데도 서류를 조작당해 팔려가기도 했다. 양부모가 도로 시설에 아이를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아동시설에 수용된 아이는 1960년 1월 기준 542개 시설 6만504명에서 1966년 546개 시설 7만859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아동 수출은 1970년대 나라의 살림이 좋아진 뒤에도 증가세였다. 국제사회로부터 ‘아동수출국’이란 지탄까지 받게 됐다.

물론, 집단수용시설 피해자 중 적잖은 이가 해외입양을 꿈꿔봤다. 고(故) 조영수 씨(국제신문 지난달 9일 자 8면 보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모두가 김 씨처럼 결과가 좋지는 못했다. 양육 능력이 없는 가정에 팔려가 ‘야만 시설’ 못지 않은 인생을 살아야 한 경우가 있었다.

김 씨는 좋은 가족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러나 당시 이미 청년이었던 자신에게 왜 입양을 제의했는지는 의문이다. 분명한 점은 그에게 입양이 곧 생존이요, 야만으로부터 피난할 최후의 기회였다는 것이다.

김 씨는 “후원자가 많았던 무렵에는 입양을 권하지 않다가 지원금이 줄 무렵 양자로 보낸 게 지금도 의아하다”면서도 “미국인과 공평하게 되고자 무척 노력했다. 내가 강해진 건 영화숙 이후 입양을 거치면서다. 야만의 공간 근처를 머물렀다면 없었을 일이다”고 말했다.

영상= 박세종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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