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내 안에 잠든 생명력 깨웠죠… 은퇴 후 배우로 인생 2막 시작합니다"

신하연 2024. 8. 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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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규 '평화의 숲' 이사·전 문화일보 사진부장
김선규 전 문화일보 사진기자. 이슬기기자 9904sul@

"내가 당신을 이렇게 그리워 해 본적이 있었던가!! 당신 없는 세상 죽기보다 싫다."

큐사인과 함께 조명이 환히 켜지는 순간, 무대 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열 명 남짓한 배우들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적막 속, 김득천 어르신이 토해내는 간절한 외침이 작은 강당 안에 울려 퍼졌다.

살고 싶지만, 결국 죽음을 고민하게 되는 노년의 삶. '김득천'을 연기하는 배우 김선규(61·사진) 씨의 손짓과 걸음에는 일흔 두살 노인의 고뇌와 번민이 묻어있는 듯 했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내수동 교회 2층 강당에선 연극 '소풍가는 날'의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었다. '소풍가는 날'은 아내와 사별하고 자식들과도 연락이 끊긴 채 독거노인으로 살고 있는 김득천 씨가 삶이 그렇듯 죽음 역시 준비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그린 웰다잉 연극이다. 연극 경력만 55년인 '연극계의 거장' 장두이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주연을 맡아 베테랑 못지않게 열연하는 배우 김선규 씨는 사실 이번 작품이 그의 첫 데뷔작이다. 연습을 마친 그는 쑥스럽게 웃으며 "사실 연극은 대학생 때 개론 수업 한 번 들은 게 전부"라고 말했다.

놀라운 건 그가 신문사에서만 35년을 보낸 전직 사진기자라는 사실이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지난 2022년 10월 문화일보에서 퇴직한 그는 '미확인 비행물체(UFO) 기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1995년 9월 경기도 가평에서 참깨를 타작하는 노부부를 찍은 필름에 UFO가 포착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이 됐다. 지금도 국내에서 찍힌 가장 유명한 UFO 사진으로 그의 사진이 꼽힌다. 그 외에도 '탈영병의 최후', '목숨 건 도강 10분', '까치의 헌화' 등 수많은 특종 사진이 있었지만 배우 김 씨가 가장 애착을 갖는 사진은 '목마른 참새'라고 한다.

"매일 마감에 쫓기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공원 한편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 한방울을 마시던 참새 사진을 찍었지요. 그 사진은 모든 사물이나 대상을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어요."

그날 이후 신문에 '생명을 찾아서' 시리즈를 연재하는 등 무심한 일상을 마음으로 지켜보며 '생명의 존재'를 렌즈에 담았다. 현재 그는 접경 지역에 숲을 만드는 시민단체 '평화의숲' 이사를 맡고 있다.

2022년 10월 31일 어머니가 직접 마련한 떡 두 말을 직장 동료들에게 돌리고, 35년간의 사진 기자 여정을 마감했다. 그러고선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고, 농자재를 구해 고향인 경기도 화성에서 농부로 변신했다.

은퇴 전 결심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농사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곡식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데, 초보 농부에게 땅은 쉽게 결실을 내주지 않았어요. 고구마, 블루베리, 옥수수 등 심는 족족 모두 망쳤지요. 결국 제 키보다 크게 자란 명아주 딱 한 그루만 건져 어머님께 지팡이를 다듬어 드렸어요."

돌아보니 수확물이 '명아주 지팡이'뿐만은 아니었다. 그는 "(여행자학교에서) '톡톡, 내 안에 잠든 생명력'이란 주제로 강의를 준비하면서 내 안에 잠재된 무한한 가능성에 눈을 떴다"며 "뚱딴지 소리 같지만 남들 생명력을 깨우려다 내 생명력이 깨어났다"고 했다.

강의를 모두 마친 어느 날, 명상 중 내면 깊은 곳에서 어릴 적 모습과 마주한 그는 "학예발표회를 열심히 준비하면서 뜨거운 박수를 받고 있었다"고 했다. 명상에서 깨어난 후 한껏 고양된 에너지를 느낀 그는 문득 '자유롭고 창조적인 삶을 살자'고 한 자신과의 약속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대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할 기회가 생겼다. 극중 세 마디짜리 경상도 대사를 위해 '친구' 등 사투리가 나오는 영화 10여편을 봤다. 경기도 양평에서 꼬박 12시간에 걸친 영화 촬영을 마친 그는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35년간 매일 매일 데드라인이 있는 삶을 살면서 어떻게든 잘 해보려고 아등바등했는데 여기서 비로소 해방되어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전직 사진기자 김 씨의 삶은 이후 한 차원 다른 시공간으로 이동한 듯 했다. 가수 호림의 뮤직비디오 '아버지의 육십'이라는 곡에 아버지 역으로 출연해 어버이날 유튜브에 공개됐다. 이어 웰다잉극단의 2024년 공연작품 공개 오디션에서 주연배우로 캐스팅됐다.

"오디션장에서 아무 기대 없이 후련하게 연기를 쏟아내고 나왔는데 뜻밖에도 그날 밤 11시쯤 캐스팅 연락이 왔다"는 그는 "선동혁 배우에게 수개월간 대사를 꽂는 법과 연기 개인지도를 받고, 고양문화원에서 매주 최재길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우며 배우의 길로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장두이 감독은 오디션 장에서 김 씨를 보고 "오만 것들이 다 들어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연습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김득천을 '연기'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를 잃고 자식들과도 연락이 끊긴 외로운 노인에게 감정 이입되면서 "김득천이 내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온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여 새로운 가능태 공간으로 접어들자 놀랍게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면서 "앞으로 펼쳐질 내 삶의 목표는 모든 가면을 벗어버리고 내 안의 멋지고 놀랍고 기쁨으로 가득한 존재가 삶의 무대 전면에 등장할 수 있도록 몸을 긍정하고 나를 놔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남은 모든 생이 '여생'이라며 뭘해도 좋다. 내 안에 있는 진정한 열기를 찾아보면 좋겠다"고 밝게 웃어보였다.

신하연기자 summer@dt.co.kr

사진=이슬기기자 9904s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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