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살핌이 곁에 오래 남도록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4. 8. 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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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22일 새벽 비가 내리자 지리산 자락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손자영 | 자립준비청년

보육원 퇴소 후 홀로서기를 해야 했던 나는 ‘더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살았다. 강하고 씩씩해야 하는 나에게 불안과 우울의 감정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어둠의 감정들은 모른 척하기 바빴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더 큰 파도를 만들어 다시 돌아왔다.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나를 살피지 못하는 일상이 쌓일 때쯤 “자영아, 괜찮은 척 안 해도 된다”는 지인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도 있었다.

얼마 전 나의 ‘괜찮은 척’을 눈치챈 지인과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한옥에 짐을 풀기도 전 툇마루에 발을 쭉 뻗어 누웠다. 매일 보던 자취방 천장 대신 구름이 가득한 파란 하늘을 보는 것만으로 숨통이 틔었다.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밤하늘을 이렇게 오래 본 적이 언제였나 생각했다. 숨 가쁘게 달리던 일상을 멈추니 비로소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그간 회피하던 불안과 우울들을 제대로 마주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또한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순간마다 하고 싶은 것을 즐겼다. 땀 흘리며 동네를 달렸고 나무로 우거진 숲속 둘레길을 걸었다. 걷다가 계곡을 만나면 발을 담가 더위를 식히며 도시락을 먹었다. 피곤하면 새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낮잠을 잤고 밤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각자 사는 이야기도 나눴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여러 관계 속에서 작은 살핌을 주고받았다. 집주인으로부터 아침마다 정성껏 차린 밥상을 받았다. 혼자 살면서 밥을 잘 챙겨 먹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를 위한 따뜻한 밥상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또 함께 여행한 지인과 여행 내내 잠은 잘 잤는지,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더 걸어도 괜찮은지 물으며 서로를 챙겼다. 질문을 주고받을 때마다 잠깐이지만 나를 살폈다. 누군가의 살핌 덕분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들을 다시 생각하기도 했고, 나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 덕분에 회피했던 감정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나는 그런 작은 살핌이 우리가 자립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

지난 5월 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하나로 보육시설에서 지내는 보호아동을 위한 ‘살핌키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살핌키트’는 자립준비청년 당사자인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들이 사춘기 시절 필요했던 물품과 함께 살핌의 경험을 전하고자 제작한 키트다. 사춘기 시절 맞이하는 몸의 변화로 새로운 속옷을 입어야 했을 때 누군가에게 편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경험이 있다. 한 친구는 면도하는 법을 몰라 면도기에 베이기도 하고 일회용 면도기를 300번 넘게 사용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을 보호아동들이 살핌의 순간을 경험하기를 바랐다. 살핌키트를 통해 보호아동들을 살피는 존재가 있다는 것과 자신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으면 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속옷 줄자를 먼저 보내 직접 자신의 속옷 치수를 재볼 수 있도록 하고 원하는 속옷을 고를 수 있도록 했다. 남자아이에게는 전기면도기와 날면도기를 같이 보내 자기에게 맞는 것을 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또 아이들이 후원 물품이 아닌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전했다. 친구들을 위해 썼던 편지들은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게 해주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자립할 때 필요한 마음의 힘은 자신을 살피는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잘 살필수록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자기다운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나를 돌볼 수 있는 마음은 누군가에게 받은 살핌의 경험에서 시작한다. 여행 기간 경험한 살핌의 순간들로 나를 돌볼 수 있었던 것처럼 더 많은 보호아동, 자립준비청년들이 살핌의 순간들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나도 이제는 ‘더 강해져야 한다’ 대신 ‘서로를 잘 살펴주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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