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만으로 성공할 수는 없지만 [플랫]

플랫팀 기자 2024. 8. 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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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관용적이라 리뷰에 쓰기에 그다지 좋지 않지만,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단 에투알(최고무용수) 박세은의 ‘빈사의 백조’를 보고서는 딱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1907년 전설적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초연한 이 작품에서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에 맞춰 발레리나가 서서히 무대에 오른다. 무용수는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수면 위를 이동하지만, 이 백조는 제목 그대로 죽어가는 중이다. 첼로 선율, 푸른 조명에 휩싸인 백조는 엄습한 죽음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마지막으로 몸을 떤다. 잦아드는 첼로 소리와 함께 백조의 생명도 빠져나간다. 막이 내린 뒤에도 박수는 다음 무대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이어졌다. 죽음의 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안무의 기괴함에 놀랐고, 그 아름다움을 완벽히 체현한 박세은의 몸짓에 다시 놀랐다.

(좌)파리 오페라 발레단 에투알 박세은의 ‘빈사의 백조’. 예술의전당 제공 (우)8일(현지시간) 프랑스 샤토루 슈팅 센터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사격 공기권총 10m 여자 결선에 앞서 주어진 5분 연습에서 오예진이 과녁을 조준하기 위해 눈가래개를 덮고 있다. 연합뉴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은 1669년 창단됐다. 박세은은 입단 10년 만인 2021년 이 세계 최고(最古) 발레단 최초의 동양인 에투알이 됐다. 박세은은 자신이 최고 반열에 오른 비결은 ‘타이밍’이었다고 말했다. 좋은 시기 입단해 자신을 알아봐준 좋은 예술감독을 만났고, 동료들의 임신이나 부상으로 무대에 설 기회를 잡았다. “제가 너무 잘해서 거기까지 갔다고 하긴 어려워요. 다만 포기할까 하는 마음을 가진 적은 없었어요. ‘할 수 있을 거야. 무대에 설 수 있을 거야’ 하는 마음을 가졌어요. 후배들의 상담 요청도 많이 받지만 ‘너만의 타이밍이 올 거니까 조급해하지 말고 해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어요. 예술에서는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다보면 좋은 길이 열릴 수 있으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오랜 시간 발레단에서 춤을 춰도, 예술감독이나 동료에게 호감을 사도, 에투알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기복적 종교관을 갖지 않은 다음에야, 나만의 ‘타이밍’이 온다는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그렇게 근거 없는 ‘자기확신’이 박세은을 세계 최고 경지에 올렸다.

예술이란 분야는 그 정도가 심하지만, 따져보면 세상 많은 일이 그렇다. 노력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 온라인 게임에선 들인 시간만큼 레벨이 오르지만, 삶의 성취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지, 원하는 직장을 구할지 알 수 없다. 어느 정도 성공의 경험을 누적해 노하우를 가진 중장년에 비해, 아직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확고히 하지 못한 청년은 ‘자기확신’을 갖기 더욱 어렵다.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각색했다. 가난한 청년 음악가 오르페우스는 강물이 반지를 주고, 새들은 깃털을 떨궈 이불을 만들어줄 것이라며 에우리디케에게 청혼한다. 에우리디케는 청혼을 받아들이지만, 곧 노래는 장작이나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르페우스가 기약 없는 작곡에 매달리는 사이, 에우리디케는 부유한 하데스와 계약해 허기를 채우려 한다. 오르페우스는 하데스의 영토인 지하세계로 내려가 에우리디케를 데려오려 한다.

오르페우스의 용기, 아내 페르세포네의 설득에 하데스는 에우리디케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조건이 있다. 지상으로 돌아가는 기나긴 여행길 동안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 앞에서 걸어야 한다. 손을 잡아도, 팔짱을 껴서도, 옆에 서도 안 된다. 에우리디케가 자신을 따라온다고 믿고 무작정 걸어야 한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보기 위해 뒤돌아서는 순간, 에우리디케는 다시 하데스타운으로 끌려간다. 오르페우스에겐 에우리디케가 자신을 믿고 사랑해 따라온다는 ‘자기확신’이 필요하다.

두 젊은 연인의 사랑의 결과는 수천년 전 신화 내용이라 스포일러도 아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오르페우스를 마냥 비난하거나 비웃을 수 없는 것은, 청년이 확신을 갖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에우리디케를 무사히 데려왔다 하더라도, 가난한 예술가 오르페우스가 지상에 번듯한 신혼집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을까. 좋은 음악가가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박세은 같은 자기확신 역시 일정 수준에선 재능의 영역에 들어간다.

2024 파리 올림픽 사격 여자 10m 공기권총에 출전한 19세 오예진은 금메달을 딴 뒤 인터뷰에서 ‘결과를 예상했나’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당연하죠. 저는 잘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확신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금메달을 딴 16세 반효진은 경기 전 ‘오늘의 운세’를 봤다고 했다. “보면 소름 돋으실 거예요. 오늘은 ‘모두들 나를 인정하는 날’이라고 돼 있었어요.”

확신만으로 성공할 수 없지만, 확신 없이 성공할 수도 없다. 좋은 사회는 더 많은 청년이 확신을 갖도록 부추긴다.

▼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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