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까지 버린 일연선사 같은 분 또 있을까
엄청 뜨거운 여름날 인각사(麟角寺)의 역사적 가치를 논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사찰은 병풍처럼 우뚝 솟은 절벽 아래로 위천(渭川)이 반달 모양을 그리며 휘감아 흐르는 평지에 자리 잡았다. 인각, 즉 ‘기린 뿔’이란 절 이름이 특이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린은 동물원의 목이 긴 기린이 아니다. 용의 머리에 사슴의 몸과 뿔, 그리고 소의 꼬리에 말의 발굽과 갈기를 가진 상서러움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이다. 일본 기린맥주 상표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신편동국여지승람’에는 “동구(洞口·입구)에 석벽(石壁·깎아지른 바위)이 촉립(矗立·우뚝 서 있음)해 있는데, 옛날부터 전하기를 기린이 그 위에 뿔을 걸어 두었으므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바위 위에 뿔을 걸어둔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당나라 운거도응(雲居道應·?~902·조동종)선사의 선문답인 ‘영양괘각’(羚羊掛角)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겠다. 영양은 뿔을 나무에 거는 방법을 사용하여 몸을 숨기면서 발자취를 없앤다. 영양은 산양(山羊)의 일종이다. 사냥개가 발자국을 따라 사냥꾼을 안내하지만 영양은 뿔을 나뭇가지에 걸고서 몸을 공중에 띄운 채 숨어있기 때문에 결국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이를 선불교에서는 ‘몰종적’(沒蹤跡)이라 한다. 허공을 나는 새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일연선사도 임종할 무렵 “뿔을 세 개 가진 기린이 바다에 들어가고…”라는 말씀을 남겼다. 기린이 바위 사이에 뿔을 걸고서 숨는 것처럼 일연선사는 만년에 이곳에서 흔적 없이 은둔코자 했으며 마지막에는 흔적 없이 종적을 감추는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인각사에는 일연(一然·1206~1289)선사의 부도와 탑비가 남아 있다. 절 밖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것을 제대로 관리하고자 1962년 인각사 경내로 옮겼다. 비교적 온전한 부도와는 달리 비석은 갈라지고 넘어져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도괴된 채 비각 안에 서 있다. 그럼에도 최고급 비석 재료인 귀한 검은 오석(烏石)이 뿜어내는 품위와 몇 자 남지 않았지만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303~361) 서체의 명품인지라 ‘오리지널’만이 가질 수 있는 품격은 여전하다. 원본 비석은 구산선문 문도들의 정성과 역량을 총결집하여 1295년(국사열반 6년 후) 세웠다. 글은 정치외교가인 민지(閔漬·1248~1326)에게 의뢰했다. 그는 당시 장원급제한 인물이라는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또 죽허(竹虛)스님은 4천자나 되는 왕희지체 글자를 모으기 위해 집자(集字)의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고려 최고의 비석을 만들겠다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소매를 걷어붙인 것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이후 비석이 마주한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계는 위축되었고 시설관리 능력마저 저하되면서 너도 나도 왕희지 명필 비문을 탁본하겠다고 몰려든 것이다. 지나친 탁본은 비석 보존에는 치명상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 명나라와 일본의 탁본 요청까지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비석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시면 과거에 급제한다거나 혹은 비석을 세 번 돌고 나서 손으로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앙심까지 가세했다. 또 좋은 재료로 벼루를 만들겠다고 시골 선비들이 오석을 잘라가는 일까지 겹쳤다. 게다가 위치도 경내가 아닌 동남쪽 방향으로 4~5리 떨어진 곳에 외따로 있는지라 관리의 손길마저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훼손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비록 원본 비석은 도괴되었으나 탁본 수십여점이 개인소장품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공공기관인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그리고 미국 버클리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일본 천리대 등에도 탁본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부산 출신의 재야 서지학자 박영돈 선생 덕분에 빠진 글자를 탁본끼리 서로 대조해가며 짜맞춘 결과 거의 원본에 가깝도록 복원할 수 있었다. 명필의 글씨가 화(禍)가 된 동시에 복(福)이 되는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희귀한 사례라고 하겠다. 비석은 국사탄생 800주년 기념사업으로 2006년 경내에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일연선사는 1283년 국사(國師) 자리를 사직하고 개경에서 인각사로 내려왔다. 이유는 95세인 모친을 봉양하기 위함이다. 이듬해 모친이 돌아가셨으니 함께 산 것은 반년 남짓이다. 스스로 호를 목암(睦庵)이라 했다. 당나라 목주(睦州·절강성) 출신인 도명(道明)선사의 효행을 본받는다는 의미이다. 목주도명은 만년에 큰절의 어른인 방장 자리를 버리고 홀로 시골 암자에서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짚신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한 연유로 진포혜(陳蒲鞋)라는 별명이 붙었다. 진씨 성을 가진 짚신스님이란 뜻이다.
일연스님의 생전 효도는 6개월 정도에 불과했지만 사후 효도는 영원히 이어졌다. 열반할 때 제자들에게 부도를 세울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절 동쪽으로 2㎞ 남짓 떨어진 곳이었다. 알고 보니 정면 산 위에 있는 어머니 산소가 보이는 자리였다. 아침에 비친 햇볕이 부도에 반사되면서 어머니의 무덤을 비추었다. 해가 지고 사찰의 석등에 불을 밝히면 그 불빛은 당신의 부도까지 닿았다. 부도의 불빛이 다시 어머니 무덤을 비추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지역 주민들의 일연스님 사랑은 끝이 없다. 옮겨버린 원래 부도 자리 빈터에는 역사성을 살려 다시 새로 만든 부도를 안치했다. 어머니 산소 앞에는 1997년 ‘낙랑군부인이씨지묘’(樂浪君夫人李氏之墓) 글자를 새긴 상석을 마련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옛이야기를 구체적 형상으로 다시 살려낸 것이다. 2017년 모친 무덤과 아들의 원래 부도터를 잇는 길이 포함된 ‘일연 테마로드’라는 순례길을 만들었다. 효도길 끝자락에는 ‘일연공원’까지 조성하여 삼국유사 편찬이라는 기념비적 업적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토록 했다.
원철 스님(불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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