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와 납세자가 함께 돌려야 열리는 '복지금고'의 함의

안창남 소장 2024. 8. 5.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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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안창남의 생각
루터 공동금고와 세금 복지정책
獨 루터 하우스에 있는 공동금고
교회 재정 외에도 사회적 약자 돌봐
흥미로운 건 열쇠 구멍이 3개
시민사회 대표에게 열쇠 맡겨
납세자 동의와 합의 중요하단 뜻

여기 '공동금고'가 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자라도 맘대로 집행할 수 없다. 금고 속 돈을 사용하려면 납세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함께 금고를 열지 않으면 돈을 사용할 수 없다. 어느 일방의 결정만으로 기금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차단 시스템'을 구축한 셈이다. 놀랍게도 이런 '공동금고'가 만들어진 건 16세기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고안했다. 5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시스템이지만 현대 국가의 복지 정책에 던지는 함의가 크다.

마틴 루터가 고안한 공동금고가 현대 복지정책에 많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어느 시대나 빈곤과 질병의 퇴치는 사회가 치유해야 할 핵심 과제였다. 이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가 혼란의 늪에 빠져들고, 결국엔 폭력이 난무하는 혁명으로 이어져 수많은 폐해가 발생한다.

독일 비텐베르크 소재 '루터 하우스'에는 종교개혁을 이끈 마틴 루터가 만든 '공동금고(Common Chest)'가 있다. 이 금고를 자세히 보면 크기와 형태가 각기 다른 열쇠 구멍 3개가 있다. 금고 열쇠는 시민사회 대표, 성직자 대표, 평신도 대표가 각각 보관하고 있다. 금고 문을 열려면 3개의 열쇠를 동시에 돌려야 한다. 어느 진영만의 의견으로는 금고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거다.

지금과 달리 루터가 활약했던 당시는 종교와 정치권력이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祭政一致 시대로, 종교권력자가 정치권력의 행사는 물론 세금까지 거뒀다. 당시 사회는 물물교환 경제에서 화폐경제로 전환하고 있었는데, 경쟁력이 떨어진 수공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던 수많은 근로자들은 빈곤으로 내몰렸다. 흑사병이 창궐해 인구가 감소하고 빈민도 넘쳐났다.

사회의 버팀목이었던 농민들은 세금 성격이 포함된 종교헌금을 교회에, 영주들에게는 지대地代를, 군주들에게는 부역負役을 바쳐야 했다. 그들이 짊어진 짐이 무거울수록 그들과 정부 및 군주들 사이의 대립이 격화했고, 결국 농민전쟁(1524~1526년)으로 비화했다.

이같은 비참하고 복잡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루터는 교회 헌금으로 형성한 공동금고를 이용해 교회 재정을 조달함은 물론 교회 밖의 고아ㆍ병자 등 사회적 약자를 돌봤다. 아울러 궁핍한 수공업자와 주민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하는 용도로 공동금고를 사용했다.

공동금고의 공평한 집행을 위해 '공동금고규범'을 만들고 종교와 거리가 있는 시민사회 대표에게도 열쇠를 맡겼다. 이들이 '빈민구호'를 뛰어넘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빈곤퇴치'로 가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복지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정교분리 시대인 요즘의 복지정책은 루터의 공동금고 정책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도 지켜져야 할 몇가지 기본 원칙은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공동금고에 모인 돈으로 복지정책을 시행한다는 점이다. 공동금고는 현재 예산과 유사하다.

당시 공동금고는 그 금액이 얼마만큼 차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산에 숫자로 표기돼 있을 뿐이어서, 이게 얼마만큼 남아 있는지는 전문가 이외에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정치인들의 '재정은 걱정 없다'는 현란한 레토릭만 난무할 뿐이다. 일반 납세자들은 적자예산 편성이라는 소리가 들려야 겨우 금고가 비었다는 정도만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금고가 빈 것은 누군가는 채워야 한다는 당위는 애써 잊은 채 말이다.

둘째, 지원 대상을 분명하게 했다는 점이다. 당시 사회에서는 게으름뱅이와 유랑인들이 거리마다 가득 찼었다. 요즘 말로 '자발적 실업자'인 셈이다. 공동금고는 '건장한 직업 거지' 대신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노약자, 장애인, 과부 등을 집중 지원했다.

대출과 교육, 생계비 등을 지원하되, 이들에게 노동 의무를 부여했고 구걸을 금지했다. 노동을 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포기한 자발적 실업자에게는 복지혜택을 줄였다는 점에서 현대 복지정책에 주는 시사점은 크다고 본다.

셋째, 정치권력과 납세자가 합의한 후 공동금고의 문을 열었다는 점이다. 어느 편의 주장만으로 금고 문을 열 수 있다면, 금고가 금방 바닥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리라.

우리는 지금 복지정책의 원칙마저도 쉽게 정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현재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을 통과시켰고, 정부와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를 적극 반대하고 있다. 루터의 시대로 돌아가서 판단한다면 공동금고의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이다.

독일은 1500년대 초반에 빈곤과 복지를 풀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루터가 그 실체적ㆍ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최상의 복지국가인 북유럽(스웨덴 등)엔 루터교가 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반면 우리는 복지를 정하는 원칙 정도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재정준칙의 법제화' 등 여러 정답이 근처에 있음에도 이를 애써 외면하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안창남 AnP 세금연구소장 | 더스쿠프
acnanp@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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