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어느새 나이가 70살이 훌쩍 지나간 지도 수년이 되었다.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아 평상시 생활할 때는 실감할 수 없지만 세월이 지난 후에 비로소 소중한 가치를 알게 된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교훈이고,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자식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과정이나 성공담을 들려주지 않았고, 자랑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내가 나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했기 때문이다. 만약 어린시절 얘기를 하는 순간 자식들은 현실에 맞지 않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듣지 않을 것이며, 기술고시에 패스하여 장관으로 발탁된 사연을 자랑한다면 자식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매사에 자신감이 떨어질 것이라고 부탁하였기 때문에 자식을 위한 길이라면 절대로 자랑하지 않기로 다짐을 하였고 지금도 자식들이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고 가정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자식들이 어릴 때부터 큰 꿈을 가슴에 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맙게 생각한다.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는 글귀는 막연하게 생각없이 지어낸 말이 아니고 내 자신이 체험한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한 말이다.
어릴 적 지독하게 가난했지만 장관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자란 덕분에 나름대로 성공한 삶을 살았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였기에 요즈음 취업이나 학업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주는 의미에서 본인의 인생역정을 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여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오래전에 직접 체험했던 사실이지만 현실에 맞지 않아 다소 어색해도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5남매 중 셋째였으며 어릴 때 무척 가난하여 초등학고 졸업할 때까지 지금은 보기 힘든 보리밥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다녔다. 반찬은 고추장 한 숟갈이 전부였다. 집 주변은 묘지가 50여 개가 있고, 4000~5000평 되는 산골에 아버지가 그곳에 사과나무를 심어 과수원으로 만드셨다.
4~5학년 때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기 시작하였다. 사과나무의 취약점은 사과가 익기 전에 썩어가는 탄저병에 약하기 때문에 비가 온 후에 탄저병 농약을 뿌리지 않으면 전부 탄저병에 걸려 수확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비가 그치면 탄저병 방제를 위해 온 식구가 일을 해야만 했다. 농약을 뿌리는 사람, 호스를 끌어주는 사람, 펌프를 돌리는 사람, 물을 길어다가 방제약을 만드는 사람, 물을 길어 오는 사람 등 온 식구가 과수원에 나가서 하루종일 일을 해야 했다. 가을이 되면 사과를 수확하기 위해 새벽 4~6시까지 사과를 따고서 학교에 가곤 하였다.
담배 농사도 지었다. 아침 4~5시에 매일 일찍 일어나 6시 30분경까지 징그러운 벌레를 잡고 학교에 갔다. 담뱃잎이 누렇게 되면 잎을 따서 건조실에서 이틀 정도 말리고 3일 후 담배를 꺼내어 차곡차곡 정리를 하였다. 이때 지독한 담배 냄새가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빨려 들어가 숨을 쉬기도 어렵지만 내가 힘든 일을 해야만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 사실 것 같아 한마디 불평 없이 고통을 견디며 일을 마무리하였다. 그 외에 콩밭 매기, 봄에 벼를 호미로 심기, 보리 심고, 나중에 보리 털기 등 농사일은 끝이 없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어머니가 끌고 오시는 수레를 가지러 2km 떨어진 내덕동까지 가면 구멍이 난 검정 고무신을 신고 오시는 어머니의 수레를 내가 끌고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나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나라의 농업, 농촌을 발전시킬 수 없을까?” “우리 농업인이 잘살 수 있는 길이 없을까?” “농업인에게 정부에서 농기계를 무상으로 지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높은 사람이 되면 이러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장관이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수없이 하였다.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많이 울었다. 일이 힘들고 하기 싫어서 울었고, 다른 아이들은 공부를 하는데 일이 너무 많아 공부를 할 수 없어 울었다. 점점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서 ‘농대에 들어가 농민들이 힘들지 않도록 농림부에 가서 근무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농대를 지원하였다. 농대에 입학하여 느낀 점은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농대보다는 법대나 상대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빠른 길이 아닌가? 고민을 하였고, 심적 갈등으로 대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지원했다. 김신조 사건으로 육군에 못 가고 공군 시험을 봐서 공군에 입대하였고 38개월(김신조 사건으로 2개월 연장) 만에 제대를 하고 민관식 문교부 장관 장학금을 받아 4학년이 되었을 때 마침 농업직 기술고시 공고를 보고 6개월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여 기술고시에 합격한 후 오로지 큰 꿈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 어릴 적 소원이었던 장관에 발탁되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니 크게 2가지의 인생의 커다란 열매를 맺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1.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다!’
농림부에 근무하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보다 30분 일찍 출근해서 30분 늦게 퇴근하였다. 미국의 신경학자 다니엘 레비틴이 말하였다. 세계 어느 분야에서든 “1인자 중에서 1만 시간을 노력 안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1만 시간이라면 한 사람이 매일 3시간씩 노력하면 1년이면 1000시간이다. 10년간 매일 3시간씩 노력하는 ‘1만 시간의 법칙’을 통해서 유명한 축구 선수, 음악가, 배우, 박사가 나오는 것이다. 큰 꿈을 간직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끈질기게 노력하여 값진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2.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았다.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릴 때 농사를 지으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농림축산식품부에「정성분 기금」을 만들어 어려운 동료, 후배들을 돕고 있으며, 청주 덕성초등학교「덕성장학회」를 만들어 후배 육성을 지원하고 있다.
소규모 농업인의 소득증대와 도시 소비자의 안전한 농산물 공급을 위한 (사)로컬푸드운동본부를 창립(2019.11.26) 후 정착을 위한 지원대책을 추진하였다.
2000년 모친 소천에 따른 부의금 2200만 원을 모친 성함을 딴「정성분 새마을 기금」으로 조성하고 차관보와 차관 그리고 마사회 감사 재직 시 매월 50만 원, 장관 재직 시 매월 100만 원을 적립하여 총액 1억 원 이상 기금을 조성하여 암 환자 등 어려운 직원에게 200~300만원 후원, 불우 학생 장학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한국농어민신문 대표 퇴직 시 퇴직금을「서규용 기금」으로 2700만 원을 조성하여 어려운 직원에게 지원하고 있다.
요즈음 학교 다니며 흘리던 눈물이 생각난다. 그 옛날 떨어진 검정 고무신에 새끼줄로 신발을 감싸고 힘든 일 하시던 그리운 어머니가 문득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어쩌면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안쓰러운 어머니의 그 모습이 어린 나를 꿈꾸도록 하는 희망을 주지 않았나 싶다. 소중하고 값진 정서를 갖도록 해 주신 고마운 어머니를 생각하며 꿈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음을 알기에 나는 아직도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농업이 정말 잘 되기를 바라는 꿈을 꾸며, 젊은이들이 큰 꿈을 가지고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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