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마라톤 금메달 딴 날… 황영조도 56년만에 금[역사 속의 This week]

김지은 기자 2024. 8. 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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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 마라톤의 막바지 열기를 뿜던 몬주익 언덕.

그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날로부터 꼭 56년 만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한국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그의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은메달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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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속의 This week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왼쪽 사진) 선수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오른쪽) 선수가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두 사람은 8월 9일 같은 날 금메달을 땄다. 자료사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 마라톤의 막바지 열기를 뿜던 몬주익 언덕. 40㎞까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던 황영조가 ‘죽음의 언덕’으로 불리는 이곳에서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를 따돌리고 선두로 나섰다. 황영조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1위로 골인하는 장면을 지켜본 손기정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날로부터 꼭 56년 만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운명처럼 8월 9일 같은 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시상식에서의 모습은 상반됐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는 황영조와 달리 56년 전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손기정의 표정은 어두웠다. 기미가요가 흘러나오는 동안 월계수 묘목으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다. 동메달리스트 남승룡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대선배들의 한을 풀어주듯 황영조가 시상식 직후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자 손기정은 울먹였다. “내가 죽기 전에 한국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오늘은 내 국적을 찾은 날이다. 같은 날에 이겨 잊히지 않게 만들어줘 더욱 고맙게 생각한다.”

1936년 24세의 청년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결승 테이프를 끊었을 때 10만 관중이 환호했다. 그러나 경기 후 그가 한국의 친구에게 보낸 엽서에는 ‘슬푸다(슬프다)’라고 적혀 있었다. 당시 외국인들이 사인을 요청하면 그는 망설임 없이 한글로 이름을 적고 한반도를 그려 넣거나 ‘KOREA’라고 적어 당당히 한국인임을 알렸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에는 손기정의 국적은 일본, 이름도 일본식인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표기돼 있다. 바로잡아 달라는 대한체육회의 요청을 일부 받아들여 IOC는 2011년 선수 소개란에 한국의 손기정으로 명시하고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시대 배경을 설명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공식 국적과 이름은 수정되지 않았다.

암울했던 시절,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를 불러일으킨 ‘국민적 영웅’ 손기정은 2002년 세상을 떠났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후 은퇴해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에 이어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은메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번 2024 파리올림픽에서 한국은 마라톤 출전권을 따지 못해 뛸 수 없게 됐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 이후 48년 만의 불참이다.

김지은 기자 kimjieun@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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