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푼 것은 잊는, 김민기의 아름다운 건망증
이두헌 다섯손가락 멤버
대중음악계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김광석을 광석이라고, 조용필을 용필이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아쉽게도 나는 김광석을 여전히 광석씨라고 부르며 조용필은 아직도 적당한 호칭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은 동시대의 인물을 자신과 연관 지어 서술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런 일반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김민기를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주변인에 불과하다. 김민기와의 직접적인 인연과 만남이 일종의 전설이 되어 당사자에겐 마치 그 옛날 예수를 직접 보았던 이들의 종교 체험처럼 느껴지는 오늘도 나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만이 인연일 이유는 없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김민기를 먼발치에서조차 단 한번도 직접 마주친 적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 깊이 그를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김민기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0살 무렵이었다. 동네 삼류 극장 옆 건물에 있던 레코드 가게의 스피커에서 들려오던 멜로디 ‘바람과 나’.
“물결 건너편에/ 황혼에 젖은 산 끝보다도 아름다운/ 아 나의 님 바람” 한대수의 충격적인 목소리에 실려온 그 가사가 한순간에 내 마음에 천둥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에서 일하던 형들이 듣던 같은 노래의 다른 목소리. 그 바람 같은 소리가 김민기였다. 낮은 안개 같은 그 소리에 취해 먼 훗날 나는 그처럼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형들이 몰래 듣던 그의 노래들을 모두 외우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노을 저 건너의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을 늘 그리워했고,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는 나였으며, “싸움터에 죄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가사의 뜻을 알고 싶어 냉가슴을 앓기도 했다.
사촌 누이가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로 오며 가져온 클래식 기타는 어느덧 손에서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었고, 어떤 경로로 내게 다가왔는지 모를 ‘메아리’라는 두툼한 책 속에서 만난 ‘금관의 예수’를 후배 안치환에게 넌지시 알려주던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나는 전기기타와 하드록에 빠져 있으면서도 김민기라는 이름 석 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록 밴드의 일원이 되어 내가 만든 노래가 수요일의 찬가(‘수요일엔 빨간 장미를’)가 되고 ‘새벽기차’가 낭만의 한 축을 차지할 즈음 먼발치에서 처음 그를 만났다. 들국화의 전인권·최성원 형님과 함께 너무나 친숙하게 얘기를 나누던 그의 주변에서 주뼛거리던 내 모습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을까? 말을 건넸다고 한들 무슨 말이 돌아왔을까? ‘이층에서 본 거리’도, ‘전자오락실에서’도, ‘어려운 세상’도 모두 당신께 배운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나온 노래라고 한들 그저 공허한 혼잣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쩌면 음악적 순교자인 김민기의 음악이 나를 철들게 한 사건이 먼 미국 땅에서 일어났다. 미국에 유학 중이던 시절 한국인 가톨릭 신부 한 분을 따라 척박한 미국의 동북쪽 끝 메인주의 한 마을에 반강제로 끌려갔던 어느 날. 미사가 끝나고 신자들에게 나를 가수라고 소개하며 다짜고짜 노래를 시키는 신부님의 그 무례함이 괘씸해 나는 성의 없이 이수미의 ‘여고 시절’을 불렀다. 그 노래의 1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들리던 조용한 울음소리는 이내 통곡으로 변했고, 혼자 부르던 ‘아침 이슬’은 서서히 합창이 되어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헬로 아저씨’를 따라 미국에 왔다가 온갖 학대를 당하고 버림받은 여인들이었다. 어렵게 얻은 아들이 명문대에 입학한 기쁨도 잠시, 입학식을 앞두고 등반 중 실족사한 아들을 가슴에 묻은 한 어머니는 그날 내가 부른 ‘아름다운 사람’의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라는 가사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노래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학전 폐관을 앞둔 지난 3월5일, 나는 ‘학전 어게인’ 콘서트 일곱번째 무대에 올라 그의 노래 ‘새벽길’을, 그리고 내 노래 ‘새벽기차’를 어쿠스틱 기타 한대와 목소리만으로 이어 불렀다. 릴레이로 이어진 이 공연에 말기 암을 앓던 그는 직접 참석하지 않았지만 녹화된 영상으로 모든 공연을 찬찬히 봤다고 했다. 다음날 연출자를 통해 내게 말씀을 전했다. “혼자서 채운 무대가 참 좋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이해인 수녀의 시에 등장하는 한 사람처럼 남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극히 조그만 것이라도 다 기억하되, 남에게 베푼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것이라도 잊어버리는 아름다운 건망증을 앓은 환자 김민기.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하는 시대, 그가 노래했던 ‘그날’은 언제일까? “해가 지는 날, 별이 지는 날/ 지고 다시 오르지 않는 날이”
이두헌/다섯손가락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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