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희 칼럼] 2024 파리 올림픽을 계기로 프랑스를 다시 바라봄
여전히 멋지면서도 충격적으로 엉성하고 대충대충
이제 한국의 좌파들도 프랑스 환상에서 벗어나려나
프랑스가 100년 만에 개최한 파리 올림픽은 이래저래 잊히기 힘든 올림픽이 될 것 같다. 개회식이 특히 그렇다. 경기장을 벗어나 센 강과 에펠탑을 무대로 프랑스 매력을 한껏 보여주려는 창의적 발상은 신선했으나 운영과 콘텐츠는 거센 논란과 미흡한 완성도로 얼룩졌다. 우리에게는 국가명을 북한으로 잘못 읽은 치명적 실수로 오래 남을 것이다. 세계 각국의 기독교인들한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장면으로 종교를 조롱하는 듯한 불쾌감을 안겼다. IOC가 동영상을 삭제하고 개회식을 연출한 감독 토마 졸리가 사이버 위협에 시달리다 못해 당국에 수사 의뢰까지 하게 된 소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런 소란에 묻혀 지나갔지만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문제적 장면은 더 있었다. 그중 하나가 센 강변의 콩시에르주리 창가에서 피를 내뿜는 장면과 함께 목 잘린 여성을 내세운 퍼포먼스였다. 콩시에르주리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감됐던 곳이다. 단두대에서 처형 당한 왕비를 재연한 것이다. 이번 올림픽 개회식은 ‘성 평등’의 역사를 한껏 강조하면서 프랑스 역사의 페미니스트 10인을 황금 동상으로 소개했다. 그래 놓고 프랑스로 시집 왔다 온갖 혐오와 헛소문 속에 황당한 죄목을 덮어쓰고 희생된 외국인 왕비의 머리는 프랑스 역사의 전리품처럼 소개하는 그 ‘선택적 정의’가 프랑스의 자가당착을 보여주는 듯했다.
파리 특파원이었던 인연 때문에 파리 올림픽을 계기로 프랑스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역대 파리 특파원들이 프랑스 뉴스를 전달하고 소개하는 일은 종종 이중 장벽에 부딪힐 때가 많았다. 유럽의 경제 대국이고 외교 강국이라는 점 말고 프랑스가 ‘소프트 파워’로 세계사에서 누려온 남다른 프리미엄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리고 공화주의 이념을 세계에 수출한 나라, 문화와 예술 선진국, 68혁명으로 상징되는 저항과 자유 정신, 반미(反美)·반 세계화 기수로 프랑스는 실제 국력보다 국가 이미지가 더 높게 매겨지는 나라였다. 이 대단한 자부심이 때로는 프랑스 지식인이나 정치인들로 하여금 프랑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벽이 됐다.
20년 전 주재 당시 이민자들의 소요 사태가 프랑스 역사상 처음 터졌다. 파리 외곽 이민자 거주 지역에서 2명의 10대들이 경찰 검문을 피해 도망가다 숨졌다. 이를 단초로 이민 2세들의 소요 사태가 확산됐다. 프랑스 내부의 불평등이 곪다 못해 이민자 소요로 폭발하기까지 프랑스 내부에서는 자유·평등의 공화국 정신 덕분에 평등이 뿌리내려 이민자 등 소수를 위한 ‘긍정적 차별’ 제도도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할 정도였다. 프랑스 스스로 공화국 근본주의에 빠져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과 소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느끼다가 소요 사태가 터졌을 때 한국 매체들 중에 제일 먼저 보도했는데 그때 한국 내 반응이 참으로 황당했다. 우파 매체가 ‘평등한 나라’ 프랑스를 흠집 내려고 과장 보도를 한다고 한국의 좌파 진영이 비난했다. 소요 사태는 프랑스 전역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고 전 세계 주요 매체들이 프랑스로 대규모 취재팀을 특파했다. ‘평등의 나라’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유별났던 한국의 좌파 매체들도 취재진을 파리로 급파해야 했다.
2차대전 이후 프랑스는 전후 복구 자금에 의해 경제가 급성장하는 ‘영광의 30년’을 누렸다. 경제 성장기에 터져나온 68혁명의 사회 운동에 기반해 복지를 확대하고 관대한 사회 제도를 유지했다. 1981년 좌파 미테랑 대통령이 첫 집권에 성공했다. 1980, 90년대에 프랑스에 살았던 한국 유학생이나 주재원들 눈에 한국보다 부강한 나라 프랑스의 제도와 이념은 동경과 선망의 선진국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유·평등·박애의 나라로, 톨레랑스의 나라로 소개됐다.
하지만 ‘영광의 30년’ 이후 프랑스는 ‘대량 실업의 30년’을 걸었다. 좌파 정부도, 좌우 동거 정부도, 우파 정부도 경제 살리기에 실패했다. 전통의 좌우 정당이 다 몰락했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직시하지 않은 채 부유한 삶을 즐기면서 입으로만 정의를 외치는 ‘캐비아 좌파’ 지식인이 유독 많은 나라다. 프랑스에 대한 허상이 적지 않아 특파원 시절, 있는 그대로의 프랑스를 전달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로부터 십수년 뒤, 파리 올림픽을 통해 프랑스 스스로 굴절 없이,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여전히 멋지고 대단한 점도 많지만 선진국 맞나 싶게 오륜기도 거꾸로 달고 은메달 딴 자기네 국기도 동메달 위치에 게양하는 ‘대충대충 일 처리’, 말은 유려하나 현실의 일 처리는 엉성하기 그지 없는 후진성이 혼재하는 나라가 프랑스다. 지금 보이는 프랑스는 국력이 예전 같지 않아 그런 측면도 있지만 우리나라 위상과 눈높이가 높아져 먼저 선진국이 된 나라를 대등하게 바라볼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에 대한 허상처럼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도그마와 프레임에 갇혀, 또 정치적 목적 때문에 선택적 기억의 역사, 선택적 정의만을 주장하는 집단이 많다. 다른 나라 뿐 아니라 지난 역사도 선입견이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는 지력과 지혜의 필요성을 되새기는 계기도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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