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정치를 정쟁으로 만들 때 잃는 것

기자 2024. 8. 4.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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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평범한(?) 입시 비리 사건인가 싶었다. 이것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귀결될 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나씩 실체가 알려지고, 서로 무관해 보였던 일들, 문화·체육, 경제, 외교·안보 정책, 공직자 인사, 세월호 참사 대응에 이르기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개별 사건들이 하나의 거대한 배후로 연결되었음이 드러났을 때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016년 겨울,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촛불을 들게 만든 것은 특정한 정치 성향도, 고도의 정치적 계산도 아닌, 상식과 양심을 지키려는 소박한 열망이었다. 국민이 선출한 공직자가 그 어떤 책임과 권한도 없는 개인에게 휘둘려 국가정책을 결정하고, 그것이 일부 개인들의 사적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데 무슨 거창한 이론이 필요하겠나. 대단히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뉴스의 연속이었지만, 그 때문에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 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널리 공유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의 정치적 상황은 유례없는 무력감을 자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때와 조금 다르다. 사실 어느 하나 가벼운 사안이 없다.

동해안에서 유전이 발견되었고 수천억원을 들여 시추를 결정했다는데 그 과정이 너무나 석연치 않았다. 대통령 배우자가 고가의 선물을 받은 것 자체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데, 그 이후의 대응은 더욱 이상했다. 이것이 청탁금지법에 저촉되는 게 아니라는 국민권익위원회의 해석, 선물을 준 사람이 스토커라거나 그 선물이 국가기록물이라 보관 중이라는 설명, 그런데 함께 건네준 책들이 아파트 재활용품 수거장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선물을 돌려주라 지시했는데 실무자가 깜빡했다는 해명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상식에 들어맞는 게 없었다. 수해복구 지원에 나섰던 군인이 안타깝게 사망한 사건의 원인을 밝히려던 노력이 갑자기 가로막히고, 이를 파헤치다 보니 과거 주가조작 사건의 인물이 등장했다. 그야말로 난데없다. 여당 당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는 댓글부대, 공소 취하 청탁 같은, 말 그대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드는 의혹들이 제기되었다.

하나하나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연달아 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한계에 도달했다. 출근해서 일도 해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뉴스만 쫓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무력감의 원인은 사건 그 자체에 있지 않다. 그보다 한심하고 때로는 불의한 사건을 우리는 과거에도 겪어보았다. 지금의 문제는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이 이 모든 사안들을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그저 여야 간의 ‘정쟁’으로 프레이밍한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서 적절한 해결의 길이 모조리 가로막히고 불필요한 대결 구도만 남게 되었다. 또한 현 상황에 대한 평론과 진단은 차고 넘치지만, 그것이 스포츠 중계처럼 분노, 공감의 카타르시스를 낳을 뿐 변화의 동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무력감에 일조하고 있다. 시민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정치평론의 조회수와 ‘좋아요’ 숫자를 늘려주는 역할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 일상에 너무나도 중요한 경제, 주거, 의료, 돌봄, 안전 같은 문제들은 좀처럼 정치적 의제가 되지 않고 있으니, 정치 경기장 안과 밖의 온도 차는 더욱 커져만 간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잇따른 자살, 5개월이 넘도록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의료대란, 반기 만에 사상 처음 1조원을 넘겼다는 임금체불 같은 문제들은 과열된 경기장에 아직 입장조차 못했다.

힘이 빠지지만 어쩌겠는가. 정치에 환멸을 불러일으켜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려는 나쁜 정치의 공세와 무력감에 맞서 싸우며 길을 찾는 것이야말로 전설의 고난극복 유전자를 가졌다는 이곳 시민들의 숙명인 것을.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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